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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독교의 본질과 영성 Ⅱ
창조 영성을 향하여 ②
김순현 목사(·고현교회 담임 ·월간지 「천리향」 발행인)






▶ 지난호에 이어

3. 부정의 길

긍정의 길이 우주적 축복과 우리 자신의 왕다운 인품의 길이자, 빛으로 나오시는 하느님(the cataphatic God)의 길이라면, 부정의 길은 어둠, 침묵, 무(無)의 길이며, 어둠 속에 계신 하느님(the apophatic God)의 길이다. 부정의 길은 어둠과 고통을 마주하는 법, 무(無)의 경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가르친다.
부정의 길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고 동무로 사귀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심장, 간, 창자, 뇌 등은 나름의 일을 밤낮없이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수행한다. 또한 우리는 모두 어둔 자궁에서 시작되었다. 자궁은 어둡기는 하지만 두려운 곳이 아니며, 우리의 원초적 존재의 거룩한 근원이다. 영적 심층과 접촉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어둡고 고요한 근원들을 묵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신비는 어둠 주위에 있고, 모든 어둠은 신비 주위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의 길은 모든 이미지를 여읜 침묵과 버림, 그대로 둠의 중요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영원히 버리고 버림으로써 하느님께로 가라앉을 수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 제게서 하느님을 없애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신적인 깊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면, 사람이 만든 하느님 이미지를 철저히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부정의 길은 비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고통이 비움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진정제(밸리엄)가 팔리는 세상에서 어둠을 직시하고,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을 심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껴안고, 충분히 오랫동안 고통에 입맞추는 사람만이 진실로 고통을 버릴 수 있다.
부정의 길이 없는 곳에서는 창조성이나 새로운 피조물이 있을 수 없다. 이미지를 여의게 하는 침묵이 없고, 풍부한 삶을 가져오는 비움이 없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無)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긍정의 길이 창조 신학과 성육신의 신학을 드러낸다면, 부정의 길은 십자가의 신학을 드러낸다.


4. 창조의 길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은 창조의 길에서 결합된다. 우리는 기쁨과 고통, 빛과 어둠, 우주와 무(無), 누림과 버림을 통해서 제3의 것이 태어나게 한다. 그것은 생생하게 다가와 자신의 신적 깊이와 신적 풍요를 드러내는 창조주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우리의 창조성-우리 안에 있는 예술가-이다. 우리의 창조성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가장 잘 의미한다. 따라서 창조의 길은 우리의 창조성과 동무하는 길이다.
창조의 길은 우리 안에 신적 능력이 들어 있음을 일깨우고, 그것을 신뢰하라고 촉구한다. 에크하르트는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배나무 씨앗은 자라서 배나무가 되고, 개암나무 씨앗은 자라서 개암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씨앗은 자라서 하느님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개인이 신적인 출산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창조주 하느님의 동역자임을 의미한다. 낳는 능력은 특정 예술이나 전문 예술가들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사람의 것이므로,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예술가를 일깨워야 한다.
창조의 길은 창조성과 동무하는 방법으로 묵상으로서의 예술을 권한다. 그것은 생활예술을 묵상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며, 우뇌로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이 빠진 영성과 신앙은 메마르게 마련이고, 영성이 빠진 예술도 건조해지게 마련이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원예, 악기 연주, 뜨개질, 점토공예, 춤추기, 연극, 시작(詩作) 등이 묵상의 방편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렇게 예술을 묵상의 방편으로 삼을 때, 치유가 일어나고, 기쁨이 솟구친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푸르러지고, 젊어지고, 어린아이와 같아진다.
낳음을 강조하는 창조의 길은 이원론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삶을 요구한다. 낳음은 양측을 아우르고, 양측과 관계함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이다. 창조의 길은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변증법, 좌뇌와 우뇌의 결합, 일과 예술과 놀이의 거룩한 삼위일체를 요구한다.


5. 변모의 길

우리 안에 있는 창조성은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지구 전체의 파멸을 초래할 핵무기를 세계 곳곳에 설치해 놓은 상태이다. 이것은 인류가 창조성을 악하게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창조성은 비판과 방향 제시를 필요로 한다. 변모의 길이 그러한 비판과 방향 제시의 기능을 한다. 변모의 길은 새로운 피조물과 동무하는 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 피조물은 새로워진 우주, 불의한 관계의 상태에서 바른 상태로 고쳐진 우주, 사람 안에 있는 새 마음, 새로운 사회 구조 속에 있는 새 의식이다. 이러한 변모를 가능케 하는 것, 즉 변모의 길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단연 동정(compassion,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다. 동정이야말로 창조성의 이정표이다. 그러하기에 창조 영성의 여정은 관상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동정’에서 완료된다.
‘동정’을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시혜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한다. 동정은 평등을 요구하고, 만물의 상호의존에 대한 자각을 요구한다. 동정은 우주적 상호의존의 진리에서 태어난 행동이다. 그러한 행동은 축제를 벌이고, 정의를 실현하는 쪽으로 행해진다.
따라서 변모의 길은 우리 모두에게 예언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불의가 하느님의 말씀을 억누를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른다. 우리 각 사람 안에는 예언자가 살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사회적인 양심이며, 무고하게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곧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기울여지는 진심 어린 배려이다. 그러하기에 예언자는 불의한 상황을 훼방하고, 동정과 사회 정의를 통하여 치유를 일으키는 쪽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
이처럼 변모의 길은 개인의 변모와 사회의 변모를 지향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의 매개자가 되라고 요청받는다. 변모의 길은 우리에게 왕다운 인품으로서의 존엄성과, 하느님의 동역자로서의 책임성에 걸맞는 우주적 문명,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고, 기쁨과 축제의 열기가 솟구치는 우주적 문명을 창출하라고 촉구한다.


6. 나오는 말

타락/구속 영성의 도식은 정화→조명→합일이다. 그것은 계단식 구조, 혹은 사다리 구조를 띤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닥다리를 다 올라간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하다. 이 도식은 소수의 종교 엘리트, 혹은 영적 엘리트만을 위한 도식이다.
반면에 창조 영성의 사중 여정은 나선형 구조를 띠고 있으며, 하나의 길은 나머지 세 길과 서로 맞물린다. 예컨대, 긍정의 길은 부정의 길이 없으면 충분히 경험될 수 없다. 부정의 길은 창조의 길에서 성취된다. 그 이유는 모든 창조성이 무로부터(ex nihilo) 그리고 어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창조의 길은 변모의 길에서 완수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성은 축제와 정의를 증대시키는 동정(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원래의 피조물과 관계가 있듯이, 변화의 길도 긍정의 길과 다시 관계한다.
무엇보다도 창조 영성은 사닥다리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아니라, 대지와 동무하는 사람들, 특히 눌린 자들(아나윔)의 편에 서는 사람들의 영성이다. 창조 영성은 예수께서 그랬듯이 눌린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해방하게 하고, 그리하여 압제자마저 해방시키는 사람들의 영성이다.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폭스는 창조 영성을 “거리의 영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창조 영성은 기쁨이 넘치고(긍정의 길), 깊이가 있고(부정의 길), 정열적이며(창조의 길), 공감이 넘치는(변모의 길) 삶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끝>

관리자  li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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