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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준비한 평신도신학자를 낳은 광주호남지역 선교를 위한 제언 - 빛고을 성자를 그리며 (Ⅰ)

오는 27일 열리는 호남선교대회를 앞두고 본지는 호남지역의 중심도시이자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광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광주 출신 목회자, 평신도들의 제언을 듣기로 했다. 광주는 선교 초기 ‘감장선교지분할정책’에 따라 감리교회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지는 못한 반면, 장로교 정서가 지배적인 도시이다. 복음선교사역의 짐을 타교단과 함께 나누어 지고자 호남지역 선교에 부름을 받은 감리교회가 찾아갈 광주의 신앙 역사를 살펴보고 광주가 낳은 신앙 선열들의 땀과 눈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편집자주>


 










오방 최흥종 목사


필자는 수천 명의 감리회 목사 중에서 몇 안되는(?) 광주출신이다. 안타깝게도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감리회 목사가 된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려 감리회 목사님 중에 광주출신이 계시면 만나 뵙고 싶다. 감리회의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서울에 올라 온지 30년이 가까이 되지만 필자가 광주출신이라고 밝히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별것도 아닌데 고향을 밝혀서 덕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는 사실 대표적인 기독교 도시이다. 1973년부터 광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금남로에 있는 광주중앙교회(9층)였다. 옛부터 광주에는 교회가 많았고 광주시 양림동에는 선교사 마을과 기독병원, 수피아여중고, 숭일중고등학교, 호남신학대학, 그리고 같은 이름의 수많은 양림교회가 한동네 한거리에 존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지금도 예수교장로회 개혁교단의 본산이고, 그 교단 신학교인 광신대학교가 있다. 또한 예장통합 교단의 신학교인 호남신학대학은 매우 역사가 깊다. 미션스쿨이 많고, 의외로 불교 사찰이 적은 편이다. 유명한 사찰인 송광사나 백양사, 대흥사는 광주로부터 몇 시간 거리이다. 또한 광주는 YMCA, YWCA 활동이 역사도 길고 활발하여 이들 단체는 아직도 광주지역 NGO의 핵심에 서 있다. 천주교도 센 편이어서 대건신학대학(광주카톨릭 대학교)이 오래 전부터 있었고, 동네마다 큰 성당이 있다. 이들 장로교와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광주호남지역의 사회지도자로서도 크게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일제치하, 해방 후, 최근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그들은 크게 돋보이게 활약하기도 했다.
이러한 광주의 현대사에서 감리교는 교회 몇 개가 활동하여 거의 존재가 미미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한국의 선교 초기에 만들어진 ‘장감선교지분할협약’에 기인하지만, 그 협약이 무효화된 해방 후 60년이 다되도록 별다른 호남선교정책이나 노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광주호남지역 모든 지자체에 감리교회가 하나씩 생기고, 호남선교대회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도 처음부터 감리교회에 다닌 것은 아니다. 서울에 와서야 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전혀 연고 없이 감리회 목사가 된 것은 수많은 선배동료목사님들의 따뜻한 배려 때문이었다. 이제 내 고향에서 감리교회가 전 교단적 행사로 호남선교대회를 개최한다하니 솔직히 만감이 교차한다.
필자는 감히 내 고향 광주(光州)를 빛고을 성지라 부르고 싶다. 개인적으로 한국이 배출한 20세기의 성자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방 선생과 맨발의 성자 두 분을 말하고 싶다. 감리교회사학자 이덕주도 오방선생을 <무등산 자락의 성자>로 정의하였다. 그런데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와 그의 양아들 맨발의 성자 이현필은 모두 광주와 인연이 깊은 분들이다. 특히 이현필 선생은 광주 출신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그가 세운 동광원이 아직도 광주에 명맥을 잇고 있으며, 개신교수도공동체 동광원의 수도자 대부분이 광주호남출신이었다. 두 분 모두 제도교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함으로써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 호남선교대회를 계기로 우리 감리교인들이 겸손하게 나아갈 일은 먼저 두 분을 중심으로한 광주의 선교역사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 두 분을 빼고 광주호남의 교회사나 선교역사가 기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바라기는 무등산에 있는 오방 최흥종 목사의 묘소를 둘러보고 본선동 소화자매원을 방문해 보는 것도 그분들의 피땀위에 세워진 광주호남지역 선교의 열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오방 최흥종 목사는 필자의 제당숙이 된 인연으로 필자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셔서 제대로 뵌 적은 없지만, 어렸을 적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분이고, 동광원은 10여 년 전부터 인연이 되어 자주 찾아보고 함께 생활해 보기도 했던 인연이 있어서 두 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해보고 그들의 선교 행적지를 순례해 보기도 했다. 특별히 오방선생을 직접 따르며 배우던 김준호(동광원 지도자), 오북환 장로(이현필 제자), 김준(새마을운동 창시자) 선생으로부터 살아생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자 후손으로서의 인연인 것 같다.
광주출신 최초의 교인이자, 최초의 장로이자, 최초의 목사였던 최흥종 목사는 호를 오방(五放)이라고 하였다. 오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오방은 다섯 가지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으로, 첫째 가사로부터의 해방, 둘째 사회로부터 해방, 셋째 경제로부터 해방, 넷째 정치로부터 해방, 다섯째 종교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즉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속을 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다섯 가지의 생활신조를 말함이다.



▲ 광주 중앙유치원의 전신인 ‘사립광주유치원’ 1회 졸업기념사진(화살표 방향이 최흥종 목사).

오방 최흥종 목사는 평양신학교 출신의 장로교 목사였고, 광주의 대표적 교회인 광주중앙교회 초대당회장이자 3대 당회장으로 담임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그러나 가정·사회·경제·정치에 매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 기성 교회의 제도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나 자신만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어지러웠던 시대에 등불이 되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하였다. 광주중앙교회에서 은퇴 한 후 최흥종 목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을 팔아버리는 기성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게 “너희 회칠한 무덤들아,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었다. 회개하라”는 내용의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교단으로부터 제명되지는 않았지만, 오갈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할 상대도 많지 않았다.
특히 최흥종 목사는 기성 교회보다는 평신도들에게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현재를 꾸짖기 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 고개 숙이지 말고 평신도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앞날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였던 것이다. 최흥종 목사는 1952년 빌링겐 대회(Willingen synod) 이후 새롭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보다 20여 년 앞서서 평신도 신학을 부르짖는 선구자였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를 부르짖었다. 교회의 희망을 일신상의 영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절을 팔아버린 거짓 목사보다는 순결한 평신도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오방 최흥종(崔興琮) 목사는 일찍이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배유지) 목사의 사택(광주시 양림동)에서 드린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을 계기로, 배유지 목사가 세운 최초의 호남지역교회인 광주교회(광주북문안교회) 초대장로를 역임하였다. 현재 광주의 대표적인 교회인 광주서현교회(예장개혁), 광주제일교회(예장통합), 광주중앙교회(예장개혁), 광주양림교회는 모두 광주교회에서 갈라진 것이어서 현재도 광주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최흥종 목사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개종 초기부터 복음의 영적인 거듭남의 기능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교회와 교인의 사회적 사명으로 연결시키면서 평생을 살았고, 광주의 전통 있는 교회들은 바로 이런 지도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100년의 호남지역 선교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배유지 목사는 1868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하여 1895년 4월 4일 한국에 처음 입국하였고, 미국 남 장로교 소속 초대 선교사로 전라도 지역에 파송되어 목포와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하다 1925년 광주에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에 안장되었다. 선교사의 4대에 걸친 헌신적인 호남선교활동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지금도 유진벨재단을 통해서 북한지원운동을 하고 있다.
 


<계속>
최장일 목사(미래경영개발연구원 원장)


 

관리자  li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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