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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동오 신홍식 목사 고찰(1)충청도 초기 교회 형성에 지대한 공헌

지난 2월 28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86주년 기념 제3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에서 고성은 목사(광리교회)가 3.1 독립운동과 기독교계 민족대표 - 동오 신홍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고 목사의 논문을 통해 신홍식 목사의 3.1 독립운동 참여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명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평양 지역의 감리교회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데 막후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집자주>

 

▲ 신홍식 목사의 가족사진. 앞 줄 왼쪽에서 세번째 인물이 신홍식 목사.

 

영적인 카리스마 갖춘 신령한 목사로서 신유의 역사 나타내

현재까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목사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홍식 목사에 대한 몇 편의 글이 쓰여지긴 하였지만 간략한 소개에 그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오류들을 가지고 있다. 필자의 논문이 신홍식 목사에 대한 본격적인 최초의 연구 논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사료 된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일단 이병헌 편저인 ‘삼일운동비사’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검토해 보았고, 신홍식 목사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인 ‘제적등본’과 ‘족보’를 신홍식 목사의 유일한 손자인 신덕수 선생을 통해서 확보하여 인용하였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1929년 조선야소교서회에서 발행한 신홍식 목사의 저서인 장수옹 ‘長壽翁, An Old Christians Story’을 인용하였는데, ‘長壽翁’이라는 책은 이덕주 교수(감신대)가 처음으로 발굴하여 소개한 자료로써 필자도 이덕주 교수를 통해서 입수하게 되었다. 이덕주 교수는 1989년 5월 ‘기독교세계’에서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 책 뒷부분에 있는 글을 중심해서 기독교와 유불선(儒佛仙) 세 종교의 동이(同異)를 논한 비교종교학의 논문으로 파악했다가 1995년에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라는 책을 통해 보면 책 앞부분에 있는 글을 통해서 단편소설로 파악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덕주 교수는 책의 성격만 논했을 뿐이지 그 책에 담긴 글을 전혀 인용하지는 않았다.

필자는 1929년 5월 22일자 ‘기독신보’에서 이 책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우화형식을 빌어 쓴 신홍식 목사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이 책을 지금까지 알려진 신홍식 목사의 생애에 대입시켜 보았더니 신홍식 목사의 전반적인 생애를 연구하는데 귀한 단초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또한 신홍식 목사는 자신의 글을 여러군데 기고한 것이 아니고 맨 처음에는 감리교회의 기관지인 ‘그리스도 회보’에 그 이후 장·감 연합신문으로 발행되었던 ‘기독신보’에만 글을 게재하였다. 필자는 ‘그리스도 회보’와 ‘기독신보’를 샅샅이 뒤져서 그의 글들과 그의 기사들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는 다 찾았다고 장담하였다. 그런데 2003년 김교철 목사가 ‘그리스도 회보’와 ‘기독신보’에서 신홍식 목사에 대한 글을 찾아 ‘삼일독립운동민족대표 신홍식 목사 연구 자료집’이라는 자료집을 엮어 내었는데, 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한 두 가지 기사들을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 김교철 목사의 자료집에는 신홍식 목사가 쓴 몇가지 글들과 신홍식 목사에 대한 상당히 많은 기사들이 수록되지 못하였다.

특히 필자는 ‘기독신보’에서 그의 아호(雅號)인 동오(東吾)를 사용하여 게재하였던 ‘신통여행(神通旅行)’이라는 동화(혹은 소설)를 발견한 것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이 동화를 본격적으로 인용하지는 못하고 그 일부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에서도 그의 행적을 조명해 줄 여러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3.1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어떻게 그가 3.1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또한 재판 과정에서 그의 진술이 어떠했는지를 제공하여 주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가 출옥한 직후 인천 내리교회에서 목회할 때 엡윗청년회의 강연 활동을 알게 해 주었다.

특히 청주로 낙향한 이후 유일하게 그의 행적을 엿보게 하는 단서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렇게 ‘동아일보’에 그의 행적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 것은 그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후 기독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명망있는 인사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특히 본론에 대하여 신홍식 목사의 생애와 목회활동, 3.1운동과 신홍식, 신홍식의 기독교민족운동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첫번째 부분인 신홍식의 생애와 목회활동을 살펴보면 먼저 지금까지 그의 출생지가 그의 사망지였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제적등본’을 통해서 살펴보았더니 그의 출생지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 25번지이라는 것이다. 또한 ‘족보’를 통해서 보았더니 그의 초명은 신홍식(申洪植)이 아니라 신홍식(申弘植)이었고, 신홍식(申弘植)이라는 이름은 그의 목회 후반기인 감리사 시절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부친 신기우씨와 모친 최살랍씨 사이에서 1872년 3월 1일 차남이자 서출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한시도 잘 지어 대재(大才)라는 칭찬 속에 한학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16세에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과거시험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삶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서출이었기에 그가 보았던 과거가 어떤 종류인지, 그가 과연 과거를 볼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는 과거에 실패했고 더군다나 갑오경장으로 말미암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여지책으로 장사꾼으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장사꾼의 길은 그가 가지고 있던 소자본마저도 탕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8-9년이라는 상당히 긴 세월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 속에서 가정이 파괴되고 친구들도 다 떠나버린, 어디 한 군데 기댈 곳이 없는 처절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고해(苦海)에 나타난 지남침은 바로 기독교였다.

지금까지 그의 기독교 입교시기에 대하여 1901년 혹은 30세로 추정을 하였는데, 1935년 5월 29일자 ‘기독신보’에 게재된 ‘은퇴수감(隱退隨感)’이라는 글을 보게 되면 그의 입교시기에 대하여 1904년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그는 지금까지 입교의 이유로 추측하여 알려진 한말의 국운이 걱정이 되어서 입교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세를 이용하여 토색을 하기 위한 아주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기독교에 입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입교한 교회는 박씨 부인(김 나오미)에 의해서 1903년 봄에 설립된 청주읍 북 감리교회였다. 이렇게 기독교에 입교한 그를 새롭게 변화시킨 것은 바로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중에 하나님의 존재도 알게 되었고, 인도(人道)도 찾아냈으며, 정의(正義)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된 그는 1906년 서원보(W. C. Swearer)선교사에게서 세례도 받게 되었고, 보은 구역에 파송됨으로 목회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913년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그는 졸업식 때 ‘역사에 하나님을 나타내심’이라는 졸업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기관을 정치와 종교로 구분하였고, 자신은 종교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결단하였다. 그는 보은 구역에 파송된 이후 입장, 목천, 직산, 진천, 연기 등 충청도 여러 지역에 파송되어 성실하게 목회하게 되었는데, 특히 1915년 제1차 충청도 지역 부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될 때 온양 구미동교회(현재 백암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신비한 종교 체험을 하게 되었고,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영적인 카리스마와 성실함을 인정받아 공주읍(현재 공주제일교회)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공주읍교회에서 사역하게 될 때 신령한 목사로서 하나님의 신유의 역사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충청도 지역에서의 목회 활동을 통해서 충청도 초기 교회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고성은 목사
광리교회

관리자  li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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