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동오 신홍식 목사 고찰(2)평양지역 감리교회의 3·1독립 운동 주도

지난 2월 28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86주년 기념 제3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에서 고성은 목사(광리교회)가 3.1 독립운동과 기독교계 민족대표 - 동오 신홍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고 목사의 논문을 통해 신홍식 목사의 3.1 독립운동 참여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명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평양 지역의 감리교회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데 막후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집자주>

 

신홍식 목사는 1917년 충청도를 떠나 관서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평양 남산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해 가게 된다. 그는 남산현교회에 시무하면서 3.1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를 하여 정치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3.1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재판에서 2년형을 언도받았지만 미결수 기간까지 합하면 거의 3년여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만기출옥한 직후인 1922년 초 인천내리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그곳에서 목회하면서 부흥사로서, 역사학자로서, 문필가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인천 내리교회에 부임한 이후 충청도 지역을 무대로 부흥사로서 활동한 바 있던 그는 이제 교단과 지역을 넘어서서 홍성, 전주, 군산, 서울 등 여러 지역에서 미 감리회의 명성 있는 부흥사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1923년 신홍식 목사는 ‘인천내리교회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 개교회사가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1900년대 중반부터 홍승하가 수집한 자료가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을 편집하고 자신의 친필로 기록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더 나아가 신홍식 목사는 옥중 종교체험인 ‘영적재판(靈的裁判)’이라는 글을 1925년 ‘기독신보’에 기고한 이후 그의 문필력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는데, 1926년 사회주의 유입으로 반기독교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에 기고하였던 ‘대장부(大丈夫)가 되자’라는 글과 1927년에 기고한 ‘신통여행’, 그리고 1931년에 기고한 ‘조선교회의 사회의식문제’라는 글들을 보게 되면 문필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엿보게 된다. 한편으로 이러한 글들을 통해서 그는 시대를 읽을 줄 알며, 시대 속에서 할 말은 하는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보여준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에 시무하던 중 1927년 감리교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감리사로 임명받게 된다. 즉 그는 원주지방 감리사 겸 강릉지방 감리사로서 활동하게 되는데, 특히 원주지방 감리사는 은퇴하기까지 계속하여 시무했다. 그는 감리사로 활동하면서 1927년 조선 남·북 감리교회 통합을 위한 미 감리회 조선연회의 연합위원 가운데 한 분으로 선출되어 통합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기 직전인 1929년 그의 참회록 성격을 지닌  ‘長壽翁’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개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에서 총리사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저조한 성적으로 낙선하게 된다. 하지만 「기독교조선감리회」로 합동된 이후 이 산하에 조직된 동부연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되어 조선 선교 50주년 기념사업요원 33인 중에 한 사람으로 수고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는 1933년 4월 급성 풍단병을 앓게 되었고, 그 이후 그에게 찾아온 병마로 인하여 결국 1935년 목회 일선에서 자원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이후에도 기독신보 이사로서 활동한 바 있던 신홍식 목사는 ‘기독신보’를 살리기 위해 주식회사 기독신보사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석하기도 했고, ‘적극신앙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계가 갈등과 반목이 계속될 때 ‘긴급동의(緊急動議)는 각성(覺醒)’이라는 글과 ‘오지자웅(烏之雌雄)’이라는 글을 통해 교계의 갈등과 반목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계의 갈등과 분열을 걱정하던 그는 1937년 고향인 청주로 낙향하게 되었고, 1939년 3월 18일 오전 3시에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1921년 11월 4일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한 신홍식 목사.

 

 

■ 목사로는 처음으로 3.1독립운동 참여의사 밝혀

3.1운동과 신홍식을 살펴보게 되면 먼저 신홍식 목사의 3.1 독립운동 참여와 관련하여 와전된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동아일보’를 통해서 보도된 재판 과정에서의 그의 진술들을 살펴보면 그의 3.1 독립운동 참여는 손정도 목사를 통해서 이승훈 장로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신홍식 목사가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한 이승훈 장로를 찾아가 단 둘이 만나게 되었을 때 이승훈 장로의 권유가 있기 이전에 먼저 신홍식 목사가 자발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3.1 독립운동에 있어서 감리교회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이며, 그 이후 상당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3.1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승훈 장로가 서울로 상경한 직후 서울에 상경한 신홍식 목사는 이승훈과 박희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서울에서의 몇 차례 회합을 통해 평안도에서 동지를 모집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흔히 독립출원 방법에 대하여 독립 선언이냐 혹은 독립 출원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신홍식 목사의 진술서에 보게 되면 독립 출원의 방법에 대해 독립 청원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몇 차례의 회합을 통해 확실히 3.1독립운동전개 방법에 대한 결론이 나지 못한 상태에서 평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며칠 후 평양에서 안세환을 통해서 3.1 독립운동 전개 방법에 있어 천도교와 합동이 이루어진 것과 독립 출원의 방법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지하에서 정부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날인할 인장을 중화 구역의 이창주 전도사를 통해서 박희도에게 전달하게 되었으며, 2월 28일 자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행해진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재판과정에서 독립출원 방법이었던 독립선언에 대하여 한마디 불평이나 혹여 잘못되었다는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의 3.1 독립운동 참여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명한 데 그친 것이 아니다. 평양 지역에서의 감리교회 독립 운동을 준비하는데 막후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삼일운동비사’에 수록된 안세환의 ‘항소공판기’에 의하면 평양 남산현교회가 평양 지역 독립운동을 의논하는 아지트의 역할을 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신홍식 목사의 취조서에 의하면 서울에서의 회합을 통해 평안도 동지 모집 책임을 맡은 신홍식 목사는 민족대표에 서명할 동지를 얻기 위해 이향리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흥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 등과 접촉한 것을 진술하고 있는데, 이들은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평양지역 감리교회의 3.1독립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신홍식 목사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박현숙을 통해서 평양 지역 3.1독립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그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울에 상경하여 평양에 없었지만 평양 지역에서 3월 1일 오후 1시 천도교는 벽암리 천도교당에서, 장로교회는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 교정에서, 그리고 감리교회는 남산현교회에서 고종황제의 봉도회에 이어 독립선언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 때 특히 남산현교회에서는 봉도회 도중 청년들이 일어나 ‘혈성가’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가 군데군데 전해져 오고 있기는 하지만 3.1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이 노래의 전모가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평양 지역에서 3.1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천도교나 장로교회가 입은 피해도 막심했지만 감리교회가 입은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 3.1독립운동 직후 평양 지방회가 개최되었을 때 한국인 목사 한명이 감옥에 있는 목회자가 많아 차라리 감옥에서 지방회를 개최하자는 의견까지 개진될 정도였다. 평양지역 감리교회에서 수난당한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필자는 평양 지역 3.1독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평양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옥중 순국한 것으로 유추되었던 평양 남산현교회의 부담임이었던 박석훈 목사가 옥중 순국한 사실을 1919년 11월 26일자 ‘기독신보’를 통해서 좀 더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고성은 목사 (광리교회)

관리자  lit1109@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