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동오 신홍식 목사 고찰(3)영혼과 민족혼 일깨운 목회자

지난 2월 28일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86주년 기념 제3회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에서 고성은 목사(광리교회)가 3.1 독립운동과 기독교계 민족대표 - 동오 신홍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고 목사의 논문을 통해 신홍식 목사의 3.1 독립운동 참여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서명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평양 지역의 감리교회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데 막후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집자주>

 


▲ 평양 기홀병원 앞에서 교인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신홍식 목사.


태화관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된 신홍식 목사가 3.1 독립운동 재판 과정에서의 당당한 진술을 하는 것을 평양 시민들이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고 많은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1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그가 경성감옥에서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여 5일 평양역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환영하였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신홍식 목사의 장녀인 신애라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히 엄청난 인파가 몰려 신홍식 목사를 환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1년 11월 16일자 ‘기독신보’에 의하면 평양 경찰서에서는 다시 3.1독립만세 운동이 재현될 것을 우려하여 평양 교계 목회자들을 불러 신홍식 목사에 대한 공식적인 환영회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평양을 대표한 민족대표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가 민족대표라고 하였을 때 충청도 대표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더군다나 같은 청주 출신으로 타향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회 활동을 전개한 정춘수 목사나 신석구 목사와는 달리 고향인 청주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충청도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제1차 충청도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중 공주읍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즉 그는 충청도 초기 교회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3.1 독립운동에 33인의 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은 충청도 지역의 감리교인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사료된다.

세 번째 부분인 신홍식의 기독교민족운동을 보게 되면 필자는 그의 기독교민족운동에 대해서 절제운동, 청년운동, 농촌운동, 흥업구락부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절제 운동은 기독교 입문 이전 방탕한 삶을 살았던 그가 1912년 미 감리회 조선연회에 절제위원회가 창립될 때부터 절제 위원으로 꾸준히 참여하면서 목회활동의 연장 선상에서 벌이게 되었고, 특히 1920년대부터 파멸로 치닫고 있는 조선 민중을 살리고자 전개된 절제운동 특히 금주운동에 대하여 외면하지 아니하고 1927년 ‘기독신보’에 금주·금연 사상이 담긴 ‘신통여행’이라는 동화를 발표하기도 하고, 금주 강연회에 연사로 나서는 등 실천적인 절제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기독교 민족운동가운데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청년운동이다. 그의 청년운동은 감리회 청년단체인 ‘엡윗청년회’라는 통로를 통해서 민족 사상을 심어준 것이고, ‘기독신보’라는 기독 언론을 통해서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청년에게 영혼과 민족혼을 일깨운 것이다. 그가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할 때 엡윗 청년회에서 행한 그의 강연회 연제들을 보게 되면 민족 사상과 상당히 연관되어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원주지방 및 강릉지방 감리사로 재직하던 1928년 성문당에서 발행한 ‘조선(朝鮮)의 강단(講壇)’이라는 설교집에 기고한 ‘누가갈꼬’ 라는 설교문을 보게 되면 그는 함정에 빠진 민족과 혼돈에 빠진 교회를 위해서 기독 청년들이 나서야 될 것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다. 특히 열왕기상 17장을 본문으로 한 ‘기독청년에게 기대함’이라는 제하의 설교에서 신홍식은 기독 청년들에게 교회와 민족을 위해 엘리야가 되고, 해상의 구름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농촌운동은 1928년 미 감리회에 농촌부가 조직되면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시무하던 원주지방 및 강릉지방도 미 감리회 조선 연회의 결의대로 농촌부를 조직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농촌 운동은 농촌 계몽운동으로 대변할 수 있는데, 그는 원주지방 및 강릉지방의 감리사로 시무하면서 야학을 포함하여 수처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가 세운 교육 기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신홍식 목사의 생애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부분이 낙향한 이후의 행적이다.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는 것은 신홍식 목사는 자신에게 찾아온 병마와 싸우는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라는 정도이다. 유일하게 1938년 2월 4일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해서 조치원 장로교회에서 전도 대강연회를 행하였다는 기록외에는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다. 병마와 싸우는 중에서도 이같은 행적은 신홍식 목사의 영원한 교역의 모습을 엿보게 해주고 있다.

낙향하여 청주에 기거하고 있던 신홍식 목사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만나게 된다. 즉 1920-30년대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에는 기호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이승만의 동지회계인 흥업구락부와 서북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안창호의 흥사단계인 수양동지회라는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이러한 양대 산맥은 1930년대 후반 일제에 의해 적발된 것이다. 전택부가 쓴 ‘人間 신흥우’라는 책을 보게 되면 신홍식 목사는 흥업구락부 회원으로 밝혀져 있는데, 아마도 인천내리교회에 시무할 때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적발된 흥업구락부 사건은 서대문 경찰서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사건이지만 흥업구락부 사건을 겪었던 윤치영의 ‘윤치영의 20세기’라는 책에 의하면 흥업구락부원에 대한 검거 작업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 대한 단초를 신석구 목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흥업구락부원이었던 신석구 목사는 이 시기에 천안 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가족들에 의하면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지만 필자는 흥업구락부 사건과 관련해서 천안 경찰서에 수감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마찬가지로 청주에 낙향해 있던 신홍식도 흥업구락부원으로서 검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오재식 편저인 ‘민족대표삼십삼인’이라는 책에 수록된 신애라의 글을 보게 되면 ‘돌아가실 무렵 인력거로 청주 경찰서에 불려가거나 병환이 더 중하여서는 매일같이 고등계 형사가 집에 찾아와 무엇인가를 엄중히 심문하고 있었다’라는 것은 아마도 흥업구락부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신홍식 목사는 구속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7년 수양 동지회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어 일제에 의해서 경성 지회로부터 전국적으로 검거 작업이 이루어져 기소가 되어 복역한 인사들도 있지만 사상 전향을 하여 기소유예를 받게 된 인사들 가운데 갈홍기 목사를 비롯한 18명이 1938년 대동 민우회라는 우익단체에 가입하겠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6월 18일 발표하게 되었고, 이 성명서는 1938년 8월 16일자 ‘기독신문’에 보도되고 있는데, 이 때 자신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반면 에 이 직후인 1938년 9월 4일에 흥업구락부 사건을 겪은 흥업구락부원들은 흥업구락부원 일동으로 사상 전향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게 되는데, 구체적인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흥업구락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의 기소자도 없고, 흥업구락부원 모두 기소 유예처분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김상태 편역인’윤치호의 일기, 1916-1943’에 의하면 흥업구락부원의 사상 전향서는 서대문 경찰서에 수감된 인사가운데 유억겸과 이관구가 작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사상 전향서가 서대문 경찰서에 수감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대문 경찰서 이외에 타 경찰서 혹은 지방 경찰서에 검거된 흥업구락부원에 대해서는 함부로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신홍식 목사는 목회 현장에서 떠나 낙향한 가운데 한 자연인으로만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감리회보’에 보면 그는 감리사 시절부터 급성 풍단병으로 고생한 이후 계속해서 병환에 시달렸고, 그의 낙향도 또한 그의 죽음이 노환(신장염)으로 말미암았다고 전해주고 있어 그가 상당히 오랫동안 병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흥업구락부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면에서는 그의 병이 유익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성격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상 전향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그는 조선 교회의 독립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력하나마 자신을 내던졌던 목회자이며, 그것을 위해 영혼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목회 활동을 한 진솔한 목회자였다. <끝>

 

고성은 목사
광리교회

관리자  lit1109@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