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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는 어디인가요. 지역별로 소개해주세요.

한국기독교 속에서 ‘감리교회’의 역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중의 하나인 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두드러집니다. 감리교회의 선교과정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리교회, 정동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과 공주제일교회의 선교과정을 살펴보면서 감리교회가 한국기독교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정동교회와 새문안교회를 한국 개신교회의 모교회 혹은 장자교회로 꼽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들 교회가 제도적인 규격을 갖춘 공식적인 교회라는 점에 초점을 둔 맞추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 감리교 선교부 목사인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자신의 처소에서 공중예배를 드린 것으로 시작되었다. 정동이 한국교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정동은 왕조시대 권력의 중심인 왕실이 위치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동은 미 대사관을 비롯한 각국 외교공관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도와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안전을 지켜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조직적 박해가 항존(恒存)하고 있었던 시대에 선교사들이 왕실을 등에 업고, 신변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동을 선호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884년 황해도 장연군 송천에 세워진 소래교회를 한국의 모교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래교회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고향인 의주에서 박해를 피해 송천 지역에 와서 세운 한국 최초의 자생적 토착교회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또한 한국 개신교회의 모교회는 ‘내리교회’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의 복음이 최초 인천으로 유입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전파되어나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로 입국하여 약 45일간 내리교회 주변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내리교회의 실제 설립년도는 정동교회에 뒤지지만, 선교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내리교회가 한국기독교의 모교회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선교의 맥은 내리교회와 정동교회를 이어 활발히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6년 4월 25일 인천 ‘제물포웨슬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봉헌했습니다. 아펜젤러와 함께 내한한 스크랜톤 선교사는 1885년 9월 10일, 상동병원에서 기도회를 드림으로서 훗날 상동교회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1892년 12월 25일 성탄일에 동대문 옆에 ‘볼드윈기념예배당’으로 시작한 동대문교회가 있고, 홀 목사가 1893년 4월 1일 평양시 서문통에 큰 목조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평양교회도 있습니다.

이러한 감리교회 선교의 역사는 공주제일교회로도 이어집니다. 예로부터 공주는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정치, 경제, 역사에서 중심적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입니다. 공주에 감리교 선교가 착수되고, 공주제일교회가 설립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공주제일교회가 충청지역 선교와 문화의 창조적인 발전에 선도적인 위치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선교는 지리적인 조건만 갖추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주제일교회가 성공적인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스웨어러(W. C. Swearer) 선교사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스웨어러 선교사는 1898년, 서울 이남 전담선교사로 임명받은 후, 공주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고 적극 나섰습니다. 이에 미 감리교회는 1902년 공주관찰부 앞에 있는 집을 구입했고, 스웨어러 선교사는 이 집에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 전도활동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동현 전도사는 선교기반 마련을 위한 부지매입(수원) 과정에서 체포돼 옥살이를 하게 됐고, 그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선교의 결실을 맺기 전에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후, 1903년 7월 1일, 미국감리회의 맥길(William B. McGill)선교사가 공주에 도착하여 이용주 전도사와 함께 공주읍내 하리동(현 앵산공원 서쪽 부근)에 초가 2동을 구입했습니다. 이 초가집 두 채가 훗날 공주 제일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공주 제일교회는 설립시기부터 한국인과 외국 선교사의 협력을 통해 선교의 역사를 개척해 나간 자취를 지니고 있다. 선교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뜻을 온 몸으로 실현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개척해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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