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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순교자 김영학 목사,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

특집 -순교자기념주일 특별기고

   

애지제 2-580: 순교자, 순국선열, 애국지사 김영학(1877-1932)의 대전 국립현충원 안장 묘역 표기이다. 매년 6월 넷째주일은 2006년 감리교 총회에서 결의한 ‘순교자기념주일’이다. 많은 기념주일을 엄수하지만 기독교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희생을 아끼지 않은 거룩한 믿음을 기억하는 것은 이 시대 진정한 신앙의 길을 비추어주는 표지가 될 것이 분명하기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감리교와 사회의 비난과 조롱의 먹잇감이 된 기독교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소중한 고백의 계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순교자 김영학 목사
2012년 늦은 봄날 오후, 논물 가득한 전형적 시골 들판 한 가운데 아름답게 지어진 교회 마당에 들어섰다. 인기척 없는 고요하고 한가로우면서도 하릴없이 평안함이 충만하다. 교회와 연한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속옷 상의 차임으로 편안하게 얼굴을 마주 대한 분이 바로 이천남지방의 대죽교회 최양섭 목사이다. 충직하며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분이다. 퉁퉁하고 넉넉한 손으로 맞잡는 손인사가 내겐 강렬하게 다가왔다. 언제 누가 들어와도 문제없다는 듯이 개방적인 사택의 거실 쇼파에 앉아 초기 한국 감리교 목회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양섭 목사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1997년, “일제하 양양지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역할” 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양양지역에서 목회하면서 그 지역의 초기 기독교 인사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주도적 역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 자료를 추적하며 연구하여 발표한 그의 소중한 논문이다. 1919년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비폭력, 무저항 만세 운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었다. 이 역사적인 항거와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은 기독교 인사들의 집단적인 참여와 주도적 영향이다. 유관순, 신석구, 제암리 교회 등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대표적 맥락 외에 전국 각처에 밝혀지지 않고 조명되지 못한 인물과 순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는 듯, 최 목사의 논문은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에서 기독교 인사들의 역할’을 집중하여 연구한다. 이러한 양양 만세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1919년 양양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김영학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히 논술한다. 논문은 김영학에 대하여 ‘양양지역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가장 큰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최 목사의 초기 한국 감리교 지도자들의 사역과 민족운동 연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2012년 5월 중순 양양의 현산문화제에 강사로 초청되어 양양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여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와 같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후대의 교회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나면 “감리교회를 대신하여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숭고한 신앙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 이 시대 우리 신앙인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자화상에 대한 통렬한 ‘자기부인’이었다.

1877년 2월 10일 황해도 금천군 조포리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김영학은 청년기에 들어 주색잡기,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30세 때, 한 전도인에게 물바가지를 뒤집어씌운 후 마음이 이상하여졌는데, 전도인의 쪽지를 보고 달려간 곳이 전도집회 장소였고 그의 가슴은 감동으로 가득차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다. 1907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이듬해에 권서인이 되고, 1909년-1910년 평산 구역장, 1910년-1911년 금천 구역장이 되며, 1911년 전도사 직첩수여, 1911년-1914년 장단 구역장, 1914년(오하영, 최태곤 3인, 8월 23일, 앳킨스감독 안수)집사목사, 1915년 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한다. 1915년-1917년 서울 광희문교회 목사(한국인 1대), 1917년-1918년 수표교교회 목사(교회 첫 번째 목사), 1918년 장로목사가 된다. 그는 1918년 양양교회를 담임하였는데, 1919년 그 곳에서 3.1운동을 맞이한다. 민족정신을 신앙으로 가르치던 김영학 목사는 만세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시위행진을 지도하며 시위 연설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그의 아내 안원정 사모(소천)는 김영학 목사에 대한 자술서 형태의 회고록에서 “주인께서는 원래가 강직한 성격인데다가 망국민으로서의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많은 청년들을 모아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는 말을 언제나 입버릇처럼 가르쳤다”고 증언한다. 김영학 목사는 ‘주님을 바로 믿으라’고 ‘나라를 사랑하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니엘같이 민족의 슬픔을 신앙으로 인내하며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절망과 암흑의 시기에 그 놀라운 해방의 꿈을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었던 것이다.

3.1만세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다 마치고 출소한 김영학 목사는 소위 ‘철원애국단’ 사건으로 다시 체포된다. ‘철원애국단’이란 조선독립을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직 중, 대한독립 애국단의 강원도단이며 그 중 김영학은 ‘양양군단’을 이끌게 된다. 이 사건으로 1922년 4월까지 만 2년여를 서대문형무소 영어의 몸이 된다. 1922년 4월 출소한 김영학은 가평교회로 부임하였는데, 그 해 9월 ‘남감리회 조선연회’의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원하여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해삼위구역에 파송된다.

안원정 사모의 말을 좀 더 빌려보면, “옥고가 가시기도 전에 자원하여 신한촌으로 들어가 그 곳 지도자들과 만나 교회를 설립하고 그 고장 교회를 두루 찾아다니며 전도 강연과 동포들에게 애국사상 고취에 전심전력하는 한편 만주 지방의 독립투사들과 연락하여 많은 분들과 왕래”하였다고 전한다. 1917년 러시아는 레닌(볼셰비키)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난다. 1920년대 러시아 공산당은 기독교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탄압을 지속하며, 1930년부터 시작된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 동포들은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흩어지게 된다. 당시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교회 예배당이 몰수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기 시작했다.

   
1933년 10월 31일자 조선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한다. 김영학 목사가 시베리아 선교사로서 “교세가 확장되어 재미있게 지냈던 바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나 제정러시아가 멸망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된 다음 반종교 운동이 심하여져서 교회당은 철회를 당하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가 되며 교도의 압박은 심하여 일반 교도들은 사후의 천국보다도 눈앞에 고통을 못 이겨 사방으로 풍비박산하는데 그 중에서도 몸을 피할 수 없어 고초를 겪고 있는 신도가 백 여 명이 되므로 소비에트 당국의 퇴거명령을 받고도 참아 남아 있는 교도를 거저 내버릴 수 없어 가족 아홉 명만 고향으로 보내고 단신으로 소비에트 당국 무서운 께뻬우의 눈을 피해가며 선교하다가 1930년 1월 3일에 마침내 께뻬우에 체포” 되었다.  이미 교단 본부에서도 선교사들의 철수를 권면하였고, 1931년 도인권, 이인선, 김득수 목사 등은 300여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연해주에서 만주 쪽으로 피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김영학은 끝까지 철수하지 않고 그 곳에 남아 교회와 동포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김영학 목사에게도 궁극의 위기가 다가왔다. 1929년 러시아 공산당의 경찰들은 해삼위 교회를 둘러싸고 가구를 파괴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김영학 목사를 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로 일곱 살 난 그의 큰 아들이 충격을 받아 며칠 후 숨지게 되는 비극적 고통을 겪게 된다. 1930년 러시아 공산당은 재판 과정을 거치며 김영학 목사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배교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을 견고히 지킨다. 그의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보면 ‘순교(殉敎)’에 대한 예감을 충분히 느끼게 하여 준다. “사랑하는 원정(김영학 목사의 부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압니다. 범사를 주님께 의탁하고 생활에 대하여는 양 목사(양주삼 목사)와 의론하여서 구차한 것을 인내하시오, <나는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지내면 좋을 것>이요.” 자신의 한 몸을 주님 사랑하는 일에 희생할 것을 생각하며 ‘나는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라는 고귀한 선언은 깊은 성령의 탄식과 함께 오늘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이 후 김영학 목사는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감옥에서 복역 중, 1932년 12월 영하 40-50도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깨진 얼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신앙과 민족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삶을 주님께 헌신한다.

당시 이와 같은 소식을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1년여의 세월이 지난 후 같은 감옥에 있던 어떤 이가 출소하여 만주의 도인권 선교사에게 상황을 전하였고 도인권 선교사가 본국에 이 일을 알리므로 선교사 김영학 목사의 순교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로령서 선교하든 김영학목사 순교>, 1933년 10월 31일자 조선일보. <김영학 목사의 순사>, 1933년 10월 25일자 4면 기독신보. 기독신보의 보도 내용을 인용한다. “기자는 다시 그의 부인인 안원정씨를 사직동 자택으로 방문하매 그 부인은 비통 중에 차있어 상복을 만드시다가 ‘이 소식은 참으로 꿈같습니다. 주를 위하여 교인을 위하여 가진 고생과 고초를 다 겪으시다가 마침내 이렇게 무참히도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최선을 다하여 그의 소식을 각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일 년 넘어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마 북쪽으로 전감가신 뒤부터는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영광의 죽음이 되겠습니다. 그는 평소에 늘 하시는 말씀이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하시면서 가족을 그 위험지대에 두고도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20여일 40여일씩을 늘 위험한 가운데로 순회하셨답니다. 이번 나올 때에도 같이 돌아오자 한 즉 책망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하시고 계시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참 목자를 기다린다. 남 호(목원대교수) 목사는 기독교타임즈에서 연재한 산티아고 순례기를 통해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병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아픔’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어 ‘아픔’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중세의 가톨릭이 베드로 성당을 으리으리하게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팔아 망가진 것을 잘 알면서도, 한국 교회가 거대한 건물만 (실은 문화적으로 거대하지도 않으면서) 몇 십억, 몇 백억의 빚을 져가며 지어가는 모습은 하나님 뜻과 멀리 떨어진 채 아픔 속에서 신음하는 병자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탐욕 속에서 아파한다.”고 깨우침을 준다.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이하며 순교자 김영학 목사를 기억해 보는 의미이기도 하다. 순교자 김영학,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다. 교회를 사랑하였다. 양 떼를 사랑하였다. 민족을 사랑하였다. 마치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것처럼 김영학은 자신의 몸을 내 주었다.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후손을 만났다. 음악을 전공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손녀 김지영 선생(탁사 최병헌 목사의 외손녀이기도 함)과 할아버지와 같이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가 된 손자 김00(선교지역과 실명을 밝힐 수 없음)이다.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순교자 김영학 목사의 묘비가 차가운 시베리아의 얼음을 뚫고 80년을 지난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듯하다. ‘나는 죽은 사람’, ‘주님을 바로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 ‘수 십 명의 교인이 있는데 어찌 목사로서 그를 버리고 나만 살려고 가겠느냐’,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이 마지막 사명이라.’

   
강릉선교교회 이대희 목사
순교자 김영학 목사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이대희 목사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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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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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당 2012-07-21 07:22:07

    목회자 역시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한 먹고 사는 일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요즘 여기저기 은퇴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송두리째 자기것인냥 가져가려는 모습에 실망이 크다. 교회당 융자받아 퇴직금을 드리고 매달 후임목회자사례의 80이나 100프로를 연금처럼 받으려한다. 빈껍데기 교회와 가슴에 구멍난 성도들,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살라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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