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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사설

아펜젤러 기념주일의 필요성

6월 11일이 아펜젤러가 순직한 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모양이다.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을 위해 목포로 가던 아펜젤러는 어청도 부근에서 일어난 선박 충돌사고로 순직했다. 수영을 잘했던 아펜젤러였지만 한국인 동료와 여학생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한국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준 것이다. 
아펜젤러는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고 양화진에는 추모비만이 서 있다. 배재 총동창회가 세운 추모비에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 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선교사로 배재학당 설립자이시다. 선교 활동 중 목포 앞바다 전복된 배에서 한국소녀를 구하려다 당신이 익사하시었다.”

그는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17년간 불꽃같은 세월을 살다가 떠났고, 그가 남긴 선교 열매들은 지금까지도 풍성한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감리교 선교사로는 매클레이가 일년 빠르게 들어왔지만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을 통해 실제적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될 만큼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내년은 그런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가 시작된 지 130년이 되는 해이다. 감리교회에서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와 더불어 아펜젤러 기념 주일을 제정하면 좋겠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아펜젤러 기념교회도 있고 순직기념관도 세워져 있지만 한국 감리교회 안에서 아펜젤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이미 이 같은 제안이 본부 선교국에 전달된 것으로 아는데, 적극적인 검토와 추진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를 계기로 아펜젤러의 선교업적은 물론 한국을 사랑했던 그의 삶이 후대에 길이 기억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물론 아펜젤러만을 기억하고 기념하자는 것은 아니다. 굳이 기념주일을 정하지는 않더라도 스크랜턴이나 매클레이, 하디 같은 초기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을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일들은 단지 선교사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뿌리를 확인하는 동시에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열정을 오늘의 선교 현장에 되살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교훈

춘추전국시대에 초(楚)나라의 한 무사가 양자강(楊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난감해진 무사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어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나루터에 닿자, 젊은이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기 시작하더니 떨어뜨린 칼을 찾기 위해 뱃전에 표시해 놓은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었지만 무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물속을 휘젓고 있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고사성어의 유래다.

세상에는 이 무사처럼 시간과 공간의 변화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옛것을 고집하거나 낡은 사고의 틀로 변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면 시대의 흐름을 놓치게 되고, 각주구검의 고사처럼 어리석은 행동이 되어 시행착오를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전 정부에서 시대착오적인 토목사업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다 사회 갈등만 확인하고 실패로 끝난 일도 그런 경우다. 이번 정부가 연이어 터지는 대형사고 앞에 무기력과 실수를 노출하는 것도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정책과 마인드의 한계라고 볼 수있다. 

감리교회 안에서 여전히 입법의회 소집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난번 임시 입법의회가 산회됨으로 개정안의 수명이 다한 것이라며 임기가 얼마 안 남은 30회 총회에서 무리하게 입법을 추진하지 말고 다음회기로 넘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부에서는 지난번 입법의회에서 중요한 내용이 대부분 통과되었던 만큼 남은 회기 중에 임시 입법의회를 열어 이를 마무리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람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르고 입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해를 넘긴 개정안을 다시 끄집어내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정안 자체에 대한 논란도 많고, 절차상의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무리한 입법의회 소집과 법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누차 지적하는 것처럼 또 다른 혼란을 만들어 낼 우려가 높다. 일부에서 집착하는 개정안에 감리교회 모두의 절박한 요구가 담겨있다면, 굳이 무리하게 임시 입법의회를 강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년으로 다가온 입법의회에 그 역할을 넘겨도 무방하고 오히려 그 편이 순리에 맞는다.

배는 이미 건너편 나룻터에 도달해 있는데, 여전히 뱃전에 새겨둔 표시에 매달려 불필요한 논쟁을 반복하고 있는 감리교회의 현실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런 뱃전의 표식을 따라 들어가 칼을 들고 나오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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