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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호 사설

개정이 필요한 선거법

오는 7일로 실시되는 감독선거는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개정 선거법의 골자는 선거기간을 대폭 단축한 것이며 이는 선거 과열을 막기 위한 취지로 이해된다. 

하지만 일정이 지나치게 짧아 제대로 된 선거가 이뤄지지 못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권자들이 후보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감리교회 현실에서 선거권자 정도라면 후보자로 나선 이를 전혀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소 알고 지내던 후보자의 면면과 선거에 나서 감독이 되겠다는 후보자를 고르는 일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후보자의 입장에서는 정책도 만들고 공약도 말하지만 정작 유권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보기도 전에 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홍보할 시간도 없고 예전 같은 정책발표회도 없기 때문이다. 선거 공보는 있지만 워낙 일정이 촉박하다 보니 만들기에 급급할 뿐 장정이 정한 ‘선거일 7일전 선거권자에게 발송’ 조항조차 지키기 어렵다고 한다. 공휴일 등을 감안하면 투표일 당일에도 선거공보나 투표장 공지를 받지 못한 선거권자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식 선거라면 무엇하러 정책과 공약을 만드는 지도 의문이다. 과거에도 공약(公約)을 지키는 경우가 적어 말 그대로 공약(空約)이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지금 같은 선거라면 더더욱 그렇다. 공약은 그저 선거용 요식 행위요 립서비스(lip-service)에 그칠 우려가 높다. 

또 선관위의 입장에서 보면 짧아진 일정대로 선거를 진행해야 하니 후보자 자격이나 불법 선거운동 시비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할 여유가 없다는 고충이 생긴다. 일단 선거를 진행해야 하니 그런 시비들은 가려내기 보다는 그저 총특재 등으로 넘기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법은 가급적 빨리 개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선관위에게는 후보자의 자격을 검증할 시간을 줘야 하고, 선거권자나 감리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바른 지도력을 선택할 시간을 줘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선거기간이 짧아졌다 해서 선거과열이나 불법 시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후보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으며, 현재 시비가 되는 일부 후보의 불법 선거운동 의혹은 모두 공식 선거 일정 이전에 발생한 문제였다. 선거 풍토와 선거권자들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선거 일정을 단축해서 깨끗한 선거를 만드는 것은 그저 착시효과에 불과하며 또 다른 형태의 혼란과 부작용을 만들어 낼 뿐이다.


함께 울어주자던 약속

세월호 특별법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고 하지만 이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한 모양이다. 여당이나 야당의 입장 차이도 여전하고 유족들의 태도가 지나치다고 보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야당이 세월호 문제를 정쟁으로 오염시켰다는 비판도 나오고 유족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심지어는 백주대낮에 유족들을 조롱하는 비윤리적 행태까지 벌어진다. 그런 와중에 터져 나온 일부 유족의 음주 폭행사건이나 무책임한 발언 시비는 유족들의 처지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 가운데는 유족들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야당에 이용당한 부분도 문제고,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한 요구들도 재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합리적인 분석이나 판단에 앞서 유족들이 자식을 잃은 처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 잃은 사람을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사람을 과부라 부르지만 자식을 잃은 사람은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다 한다.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슬픔이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 슬픔을 당한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그만하라거나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조언 정도라면 과연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라 말할 자격이 있을까 부끄러워진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세월호 참사 직후 미안하다며, 함께 울어주겠다며, 잊지 않겠다며 그들을 위로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치적 사건처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이 답답하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다시 말하지만 유족들의 주장이 모두 다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있어주는 일이라는 생각한다. 그들 주장이 옳기 때문에 그들 곁에 있자는 말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난한자, 소외된 자와 함께 하라 명하신 주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라고 이해한다. 

논어에 보면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란 말이 있다. 해석이 복잡하긴 하지만 어진 풍속이 있는 마을에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의미라 한다. 우리 사회를 어진 풍속, 좋은 이웃이 넘쳐나는 곳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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