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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호 사설

130 주년 기념사업을 보며

학술심포지엄을 시작으로 아펜젤러·스크랜턴 내한 130주년 기념사업의 막이 올랐다. 일차적으로는 2차례 학술 행사와 연합예배, 평화통일 기도회, 아펜젤러 순직길 순례 등의 행사가 내달 10일까지 이어지고, 북한 나무심기, 각막이식수술, 감리교회 역사유적 DB화 등의 기념사업이 올해 안에 추진될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교단적으로 추진되는 이번 기념사업에 대해 교회 일반의 관심과 호응은 아직도 미미한 느낌이다. 기념사업의 취지에 대한 공감대가 미처 형성되지 못한 탓이라는 지적도 있고, 기념사업의 명칭이 지나치게 복잡해졌다는 말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130년과 131년이 병기되면서 생긴 혼란들이다. 애초에 준비되기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내한 130년을 기념하자는 일이었는데, 한쪽에서 선교 개시일이 그들보다 한해 앞선 매클레이의 1884년이란 지적이 제기되면서 잠시 논란이 있었고, 결국 131년과 130년이 병기되는 타협점이 만들어진 셈이다.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것은 1885년 일이고, 이날부터 기산하면 올해가 130주년이 맞다. 그런데 1884년 7월 4일 일본 선교사였던 매클레이가 조선에 들어와 고종 황제로부터 감리교회의 선교 윤허를 받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은 사실상 이때부터이니 그렇게 계산하면 올해는 131주년이 돼야 한다.

감리교회 선교의 시작이 언제인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매클레이가 받은 선교 윤허부터를 시작으로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교의 시작일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130주년이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기념사업과 행사의 성격을 간단히 하면 될 것을 복잡하게 따지고 들다보니 130년 혹은 131년 논쟁이 반복됐고, 기념해야 할 대상을 논하다 보니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에 이어 스크랜턴 모자까지 기념사업의 명칭에 넣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학술적으로야 이런 논쟁들이 가치가 있겠지만, 기념사업이나 행사의 차원에서 보면 깔끔한 일은 못 된다. 기념사업이 명칭부터 복잡해지다 보니 공감대 형성에 지장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또 안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일을 감리교회 밖으로 알리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아서 대외 홍보에도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과 교회법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김영란 법’은 2012년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제안한 법률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공식 명칭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간단히 말해서 공직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법이다. 이런 좋은 취지의 법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대상과 처벌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또 일부 내용이 헌법과 형법 등 다른 법률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여론은 어떨까? 여론은 당연히 김영란 법을 지지하고 있으며, 국회에서 통과된 내용이 오히려 당초 취지에서 후퇴했다며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이쯤에서 교회법을 생각해 보자. 교회법은 어쩌면 엄격한 기준과 형식 절차를 따지는 사회법이라기보다는 엄격한 삶의 자세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김영란법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최근 감리교회 안에서 교회법의 존재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있었다. 과거 기독교타임즈에서 벌어졌던 부정과 비리에 대한 처리 문제도 그런 경우다. 감리교회 재산에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 논란이 되면서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 사건임에도 관련 책임자에 대한 처리는 아직도 종결되지 못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우선은 책임자로 지목된 이들과 개인적 친분 등을 이유로 두둔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법의 원칙 등을 거론하며 처벌이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답답한 것은 이미 발생한 손실과 뚜렷한 범과에 대해 다른 주장을 내놓지 못하면서 엉뚱한 시비나 물타기 식 논쟁으로 책임자들의 처리를 지연시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법은 형법이나 민법 같은 사회법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증거주의 같은 엄격함이 있어야하겠지만, 수사기능이나 처벌 권한이 제한돼 있는 교회법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원칙과 엄격함이 필요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까지도 사회법처럼 복잡한 용어나 절차가 필요하다면, 도대체 교회법이 왜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차라리 모든 문제를 사회법정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푸념까지 나온다.  

김영란법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옳고 그름을 가려주는 분명한 법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억울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되겠지만, 교회의 질서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 절차의 엄격함보다 도덕과 윤리적인 엄격함이 더 요구돼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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