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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호 사설

희망은 오늘을 위한 것

“오늘을 이렇게 열심히 살면 미래에는 행복이 오겠지.” 우리는 희망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먼 미래에 설정해 놓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삶을 가혹하리만큼 학대하고,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비록 희망을 떠올리면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만 돌릴 뿐 어느새 기대했던 미래 희망도 그 쳇바퀴에 갇혀버리고 만다. 결국 ‘헛살았다’는 고백과 함께 희망의 대상으로 산정해 놓았던 것들이 자기의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뒤에야 후회를 하게 된다.

너무 멀리 산정해 버린 미래가 이미 오늘에 들어와 있었음에도 항상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오늘이자 미래를 산 것이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어떤 것을 이루거나 얻고자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는 희망을 미래에 이루거나 얻고자 한다. 하지만 희망을 미래로 미뤄놓고 오늘을 학대하기보다는 오늘을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오늘을 가장 완벽하게 살겠노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 한다.

내일을 위한 희망에 사로잡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아이들, 우리들의 부모, 우리들의 남편과 아내들을 너무 소홀히 하여, 그 결과로 붕괴된 가정, 붕괴된 공동체에 내일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일의 희망은 오늘에 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무의미의 세계는 내가 부여한 의미로, 내가 의미를 부여한 희망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무의미에 의미주기’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오늘의 삶에 계속 의미를 주고 살아야 한다. 의미 없는 오늘을 의미 있는 오늘로 살아내야 한다.

오늘을 사는 크리스찬들은 희망을 너무 멀리 산정한다. 크리스찬들의 희망인 ‘구원’을 너무 먼 미래에 설정해 놓으니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내지 못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 주위의 이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먼 미래를 위한 자신의 창고에 자신만의 미래를 준비해가는 것이 아닌가.

성경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계신다. “오늘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 가면 네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눅12:20).”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오늘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매일매일 우리를 구원하는 삶이요, 주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구원의 현실을 이루는 것이 될 것이다.

희망! 그것은 오늘을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오늘을 위한 꿈이다. 오늘을 가장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 사과(謝過)

일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사회 각계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결국 그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온 사회를 실망케 하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는 단지 지도자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도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했을 때, 쉽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핑계나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얼마 전 “위안부 사죄 편지 털끝만큼도 생각 않는다”는 망언을 해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을 박았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의 전후 50년’이라는 글에서 “불신은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고, 불신을 해소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아베 총리의 몰 역사 망언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그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고, 그 스스로도 자유를 얻는 길이다.

사과(謝過)는 영어로 ‘apology’라고 한다. 원래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apo’(떨어지다)와 ‘logos’(말)가 합쳐진 단어로, ‘죄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사과’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은 그것을 통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와 교인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지간에도 이 사과를 하지 못해 평생 원수지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사과를 하지 못해 큰 일도 그르치는 것을 보게 된다. 

공자는 인간은 허물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허물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허물인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변명만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 소인은 저지른 과실에 대해 변명하기에 바쁘지만, 군자는 자신의 허물을 고쳐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며 군자와 소인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군자인가, 소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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