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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우리들의 영원한 목사님”故 배상길 목사 20주기를 맞아 이정정 사모를 만나다
고 배상길 목사가 별세 전에 남기고 준비한 청사진대로 세워진 목양교회를 이정정 사모가 오랜만에 찾아와 교회 앞 푸른 초장에 감회가 새로운 마음으로 섰다.

20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선연한 비전이 있다. 그 비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비스가 산에서 숨을 거둔 모세의 그것처럼, 이루지 못했지만 더 크게 이뤄진 역설의 비전이다. ‘교회만 사랑하다 못다 하고 간 목사’라는 비문을 남기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고 배상길 목사의 일생이 그랬다. 

그가 못다 한 비전은 그가 남긴 청사진대로 용인 수지에 아름답게 세워진 목양교회에서, ‘예수자랑사모선교회’ 사역으로 지난 17년간 1000명 넘게 홀사모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어온 이정정 사모를 통해, 아버지를 본받아 미국 하버드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아들과 세계선교를 꿈꾸는 딸에게서, 그리고 평생 베풀고 나눴던 그의 목양의 은혜를 입은 양떼들에게서 이뤄지고 있다. 오는 9월 25일 그의 20주기를 앞두고 한국교회가 그의 삶과 목회를 재조명해야 할 이유다.

배상길 목사

교회만 사랑하다 못다 한 목사
“목사님은 비석에 ‘교회만 사랑하다 못다 하고 간 목사’라고 새기라고 할 정도로 일생을 교회를 위해 사셨어요. 자녀들에게도 ‘목회는 전적 헌신과 완전 봉헌을 해야 한다’고 유언을 남기셨고요.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도 교회 사례금을 다 바쳤습니다. 제게 생활비를 봉투째 준 적이 없으니까요.”

구제비 하고 어려운 교회 돕는 데 다 쓰는 배 목사를 향해 ‘왜 난 생활비를 안 줘’라며 볼멘소리를 내면 기막힌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교회에서 성미쌀 주지, 전화비 주지, 기름값 주지, 교인들이 김치도 해주지, 종종 굴비도 사다 주지, 돈이 왜 필요해?’ 그러나 그 후일담을 지금도 종종 듣는다. 그 시절에 목사님 도움을 받아 많이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그의 장례식 때 농아교회 연합성가대가 수화 찬송으로 많은 조객의 눈물을 자아냈는데, 여기도 사랑과 동정심이 많았던 배 목사의 일화가 있다. 농아선교후원회 회장을 하면서 서울 농아교회의 빚 6000만 원을 갚아줬다. ‘농아인들은 농아들이 전도해야 한다’는 뜻을 감신대 총장에게 관철시켜 장학금을 분담하며 농아 신학생들을 배출했다. 그 씨앗이 결실되어 농아교회들이 세워졌다. 

“교회가 대치동에 있을 때, 건너편 건물에 한빛교회라고 맹인교회가 들어서는데, 목사님에게 허락을 구하더라고요. 다른 곳에서는 다 반대하고 쫓아내고 그랬나 봐요.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시고, 그 교회의 바자회를 우리 교회 마당에서 하게 하는 등 편의를 많이 봐주고 도와줬죠. 목사님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와서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잘 알았습니다.”

경북 상주에서 10살 때 어머니를 여읜 배 목사는 빵 공장, 이발소에서 일하다 교회 ‘종집사’가 된다. 교회 사찰 일을 하면서 뒤늦게 중학교를 들어갔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내내 전교 1등을 했다. 더 큰 꿈을 품고 서울로 상경, 삼각산 기도원에서 ‘굶식기도’를 하다가 나이 많은 그를 받아주는 환일고등학교 야간에 들어간다.

낮에는 종로의 서울대 화학실험실 급사로 일하다 밤이면 만리동 학교에서 공부하고 잠은 다시 종로의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해결하는 나날이었다. 곤고한 시절이었지만 새벽기도회를 빠진 적이 없고 십일조를 떼어먹은 적이 없다. 종로에서 만리동 가는 전철 안에서 그날그날 시험 볼 교과서를 사진 찍듯이 보면 항상 좋은 성적이 나왔다. 3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배상길 목사와 딸 배송희 목사, 이정정 사모와 아들 배동희 씨.

모든 걸 내어준 예수님의 제자
장로교 고신측 신자답게 주일은 24시간 공부도 안 할 정도로 철저히 보수적인 신앙의 세례를 받고 자랐지만 대학은 연세대 신학과를 들어가면서 진보적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신앙의 지평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 이만열 숙대 교수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신앙과 신학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어우러지고 교회와 사회가 공존했다. 정의와 사랑, 개혁과 화해가 상충되지 않는 목사였다. 한국교회 양대 세력인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앙이 조화된 장로교적 감리교인이요, 감리교적 장로교인이었다.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시골뜨기의 순수함을 잃지 않은, 타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릴 정도로 온전히 모든 걸 내어준 예수님의 제자였다.’

1975년, 중학생까지 80여 명이 출석하던 노량진교회에 부임한 배 목사는 이듬해 300명을 넘기고 빚을 갚고 흑자 재정으로 전환시켰다. 1980년, 대치동으로 옮기며 목양교회로 개명한 교회는 나날이 성장했다. 오랄로버츠대학에서 힐링 사역으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치유 목회를 통해 도심 속의 전원교회를 꿈꾸며 마침내 성전 건축으로 그 비전을 완성시키려고 했다.

“그때 목사님이 병이 들었죠. 성전 건축을 너무나 지독하게 반대하는 그 지역 사람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목사님이 갖은 욕설과 멱살잡이를 당한 건 예사고, 새벽 3시 반에도 붙들려 나가서 고초를 치렀어요. 결국 그 땅을 포기하고 지금 수지로 옮긴 거죠. 목사님은 교회도 똑같이 싸우면 한국교회 전도 길이 막힌다면서 나 혼자 십자가를 지면 된다고 내려놓으신 거죠. 나중에 그 땅에 다른 교회가 건축을 했죠.”

홀사모 사역으로 비전 이어가
현재 용인 수지 교회의 자리에 아름다운 전원교회의 청사진까지 다 만들어 놓은 후, 1997년 4월 입원한 배 목사는 그해 9월 25일 별세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였다. 매년 400~500통씩 오던 성탄 카드가 뚝 끊어졌다. 이정정 사모는 ‘목사가 죽으면 가족도 다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홀사모를 돌봐달라는 사명을 깨우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섭리였다.

“감리회 목사였던 아버지도 진솔하고 양심적으로 목회했는데 굶어 돌아가시다시피 했거든요. 교회 정치에 희생양이 됐고요. 홀사모가 된 어머니는 한때 ‘하나님이 없다’, 이러실 정도로 상처를 많이 받으셨죠. 저 또한 홀사모가 되고 보니, 이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문화에선 과부는 복이 없다. 여자가 복이 없어 남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식이다. 교회에서도 이런 미신적 편견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목사가 어제 세상 떠나면 오늘 장례 치르고 내일은 집을 내놔야 하며, 모든 진액을 쏟아부었던 교회는 이제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그가 보낸 성탄 카드를 받고 홀사모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시골집 행랑채를 빌려 메주를 쒀서 장을 담가 팔아 홀사모들의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처음엔 세 가마니로 시작했는데 30가마니를 넘겼다. 마음이 감동된 독지가들이 나타났다. 곤궁한 사모님들의 생활비를 후원했고, 천안에 땅을 사서 선교센터도 세웠다. 아직 빚이 남았지만 한 푼도 허투루 안 쓰며 갚아나가고 있다. 

아버지 배상길 목사의 묘비석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배동희 씨.

배 목사가 못다 이룬 비전을 이제 그의 영원한 신앙의 동지, 사랑했던 아내가 이뤄가고 있다. 신대원 시험 전날, 시험보다 당신이 더 중요하다고 프로포즈했던 그 청년 배상길의 순수한 열정이 오늘도 그녀의 심장에서 뜨겁게 고동치고 있다.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도림리 산 18-1번지에 목양교회 기도원 부지가 있다. 이 땅은 배 목사가 생전에 ‘목사가 교회에서 달팽이집 짓듯이 들어가 파먹으면 안 된다’면서 목회자 재교육의 비전을 품고 산 땅이다. 거기 ‘생명숲채플’에서 25일 오후 4시 그의 20주기 추모예배가 열린다.

이성원 기자  jos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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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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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정 사모님 2017-09-16 15:58:03

    이정정 사모님, 홀로된 사모들을 위해 늘 기도해주심에 감사드려요   삭제

    • 박수길 2017-09-16 10:28:56

      배상길목사님 벌써 20년이 지나는군요. 1997년에 교토교회에 오셔서 은혜스런 집회를 인도해주시고 조카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정정사모님 동희 송희를 기억하면서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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