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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아내 카타리나와 루터 후손 이야기구영철 목사, 영등포중앙교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카타리나 만큼이나 잘 알려진 여성은 보기 드물다. 그녀는 1499년 1월 29일 보르나 지역 리펜도르프에서 출생하였고, 귀족 가문이었지만, 영락한 가세로 말미암아 1504년 브레나 어거스틴 수녀원에 맡겨졌다. 수준 높은 위탁 교육이 목적이었다.  

그녀는 1509~1510년 그림마 근교 님프쉔의 마리엔트론 시토회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1515년에 종신서약을 한 이후에 루터의 개혁적인 서적들을 접하였다. 1523년 수도원에서 탈출하여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지인들 집에 거주하였다. 

카타리나폰보라가 거했던 수녀원.

1525년 루터와 혼인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다. 요한과 엘리자베스(1년을 채 살지 못함), 막달레나(13살에 죽음)와 마르틴, 파울과 마가레테 등이다. 1546년에는 남편 마르틴 루터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 카타리나는 자녀와 함께 슈말칼덴 전쟁으로 마그데부르크로 피신하였고 1547년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창궐한 페스트로 인하여 1552년 겨울에 다시 토르가우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불의의 마차 사고를 당한 후에 1552년 12월 20일에 죽음을 맞았다.

루터는 이미 1519년에 보르나 교회로 개혁의 정신을 가진 설교자 볼프강 푸지우스를 추천한 것을 기회로 1523년에만 13번이나 이곳에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가 위장 납치를 당해 바르트부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급히 가던 길에 이곳의 친구 집에서 하루 묵었다는 이야기는 이 보르나란 곳이 얼마나 안전한 지역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르나 근교에 있는 키어리취 중심지로 가면 카타리나와 루터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가 공원에 있다. 또 그 근처에 카타리나 폰 보라 학교가 있어 그녀를 기념하고 있다. 

루터는 사망하기 이전에 아내와 가족을 위해 모든 재산을 아내에게 증여하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당시 법으로는 수녀가 집안 재산을 상속받는 일이 불법이었다. 그래서 루터 사망 이후 카타리나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매우 어려웠다. 선제후와 덴마크 왕의 후원으로 간신히 살아갈 수 있었지만 지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는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그늘에 가린 한 여성의 가련한 모습을 반영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교회 안팎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에, 서로 주변을 함께 살피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차이츠란 지역은 ‘루터 후손의 도시’라 불린다. 이곳의 성박물관에는 루터의 직계 자손과 방계 자손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도서관이 있다. 루터와 카타리나 부부의 다섯 번째 자녀가 파울 루터인데, 예나에서 의학교수이자 작센의 선제후의 주치의였다. 그는 토르가우에서 어머니 카타리나가 1552년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난 후인 1553년 2월 5일에 안나와 혼인했고 여섯 자녀를 두었다. 그중 셋째 자녀인 요한 에른스트 루터가 차이츠 출신의 여성 마르타와 혼인해 여덟 자녀를 낳아서 이곳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결국 차이츠의 시장을 역임했던 프리드리히 마르틴 루터(1686~1742년)까지 루터 집안은 차이츠에서 유력 인사들을 배출했다. 

차이츠에는 1710년부터 1756년까지 루터의 마지막 직계 자손들이 살던 건물이 남아 있다. 그 이후로 방계 자손들만 남았는데, 전 세계에 2천여 명이 있다고 하며 루터 종친회에 속한 회원은 성인만 2백여 명 있다 한다. 이태리 피렌체의 영광에 큰 몫을 담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17세기에 가문이 끊겼듯, 루터 가문도 같은 시대에 직계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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