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우리 신학 한마당
5. 인간의 전적 타락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리 신학 한마당
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인간은 본성적으로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인간은 모든 선을 결여하고 있는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는가? 당신이 이 질문들에 대하여 긍정하면 그리스도인이고, 부정하면 여전히 이교도에 불과하다”(존 웨슬리, 설교 44 ‘원죄’, III.2).

복음을 전할 때 비신자들이 가장 저항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락원’의 상태에 있는데. 여전히 ‘꿈꾸는 듯한 무죄’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성경적 구원의 본질적 교리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다. 종교개혁의 구원신학의 핵심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인데, 인간의 전적 타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주장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값없이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3~24).

존 웨슬리는 ‘성경, 이성, 체험에 따른 원죄의 교리’라는 논설에서 원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기독교 계시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본성상으로 어리석고 죄 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부터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린다면, 기독교 체계는 당장에 붕괴된다”(194). 웨슬리 당대의 계몽적 합리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다. 이들은 모두 원죄를 부정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원죄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망령된 말과 같이) 아담을 따라(모방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요, 각 사람의 자연적 성품이 부패한 것을 가르침인데, 원죄는 아담의 자손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서 인간은 이로써 원의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어, 인간의 본성이 악에게 지속적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을 말한다”(종교의 강령, 제7조).

“모든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하고 올바르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인류가 처음 존재 했을 때의 원초적 본성에 관한 한 맞는 말이지만, 우리의 현재적인 타락한 본성에 관해서는 맞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하지 않다’”(존 웨슬리, 앞의 논설, 267).

인간의 전적 타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창 2:17)는 하나님의 금지 계명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데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동산 각종 나무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창2:16)는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하기보다, 지식의 나무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이다.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거짓말에 유혹당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 ‘지혜롭게 할’(창 3:6)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나 여전히 육신의 유한성을 지닌 존재로서 감히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도전하려고 한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선하신 심정을 상실한 타락한 인간의 ‘감정이 없는 이성’(헤르만 궁켈)이 빚어내는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지는 생명의 장구한 역사에서 이른바 ‘슬기 인간’(homo sapiens)의 출현이 초래한 생명의 다양한 종들의 대재앙인 멸종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대형동물들은 물론이고 좀 더 작은 수많은 동물들을 지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많은 동물과 식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료 인간들에게 까지도 가장 치명적인 존재가 되었다(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참고).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리라”(벧후 3:10).

1940년대부터 인류는 돌연히 핵시대에 진입했다. 1945년 8월에 일본에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엄청난 핵 재난이 일어났다. 과연 인류 최초의 핵분열의 성공으로 인간이 물질의 최소 단위에 도달함으로써 인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구의 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신성으로 가는 중대한 길목에 들어선 것이었을까?(테이야르 드 샤르댕, ‘인간의 미래’참고). 아니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한 것인가? 인간은 핵 위기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DNA 지도를 밝혀냈고, 각종 유전자 공학을 통해 생명의 기본 질서마저 철저히 왜곡시키고 파괴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는 미명하에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금지하신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창 3:22)하려는 또 다른 미망이다. 더 나아가 제4차 산업혁명을 통해 ‘인조인간’(AI)을 만들어 인간의 편의와 복지를 꾀하고자 하나, 그 결과는 창조주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인간이 자기 파괴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마저 우려하고 있다.

“태초에 대폭발이 있었다. 별들 안에서 핵반응이 일어났고, 그 별들의 죽은 재로부터 우리 모두는 생겨났다”(폴킹혼, ‘물리학자의 신앙’ 참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그리하여 우리가 생명의 무대 위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지 우리가 나왔던 그 흙으로 돌아가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존 웨슬리, 설교 57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 II.5).

이것이 창조주이자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내리신 엄중한 판결이자 사형에 해당하는(롬 1:32) 선고한 것이 인간들 속에 보임(롬 1:19)에도, 즉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악에 기울도록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물 가운데 드러내 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창 1:20)을 인간은 오만하게 부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짐으로(롬 1:21)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2~23).

우상숭배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롬 1:25)이다. 우상숭배의 극치는 인간의 자기 숭배인바, 그것은 인간이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정욕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기”(롬 1:24)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더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심’이란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이 우상숭배로 인하여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신다는 뜻이다. 인간의 더러운 정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성과 결혼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게”(롬 1:26~27)한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허망한 생각과 정욕을 따르려는 반항적인 피조물을 ‘내버려 두시는’(포기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의 결과다”(리차드 헤이즈, ‘교회안의 동성애’ 참고).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하는 인간의 불의한 죄는 동성애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의 목록은 적어도 다음 20가지를 포함한다. 

모든 불의, 곧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