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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濯斯) 최병헌의 민족운동
“종교와 교육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주력”
서영석 목사. 협성대학교 교수

들어가는 말

탁사 최병헌은 개신교 초기의 한국인 지도자 중의 한사람으로서 한국교회의 개척과 형성, 성장, 그리고 한국 신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최병헌은 19세기말 조선의 선비로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개종 경험을 토대로 유교적 지성들에게 복음을 증거한 변증가였다. 그는 일생을 바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으로, 성경과 찬송가의 번역자로, 교육자로, 전도자와 목회자로, 감리사를 비롯한 교계 주요 직책을 맡은 교회 행정관리자로, 사회운동가로, 문서선교 및 언론인으로, 저술가로서 당시 다양하고도 영향력 있는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근대 계몽기는 동양적 질서 속에 안주하고 있던 전통사회가 국제적 격동 속에 휘말리기 시작한 시기다. 이 시기 최병헌 목사는 전통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문물의 수용이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의 미래 지향적인 방향이라고 그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탁사는 구한말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 지도자로서 활동을 하며 민족문제와 한국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였다.
 
탁사의 활동과 영향력

최병헌의 입교와 그 이후 그의 목회사역과 대 사회 메시지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1904년 이후의 양반계급들의 입교가 이어졌고 한국사회에서 유교의 지성인들과 기독교 복음이 만나는 새로운 선교의 변화를 가져왔다.
탁사는 1893년 2월 수세 이후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신임을 받으며 곧바로 전도인으로 활약하였다. 세례 받은 그해 8월 열린 9회 한국선교연례회에서 권사(勸士)의 직책을 받았다. 이후로 탁사의 사회와 교회에 대한 영향력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그는 이미 1895년 귀국한 서재필과 함께 배재의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협회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독립협회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탁사는 1897년 ‘죠선크리스도인회보’ 주필, ‘제국신문’ 주필 등을 맡고 ‘皇城新聞’, ‘大韓每日申報’등에 자신의 글을 기고하면서 언론인으로서 대 사회 활동을 펼치며 사회 여론 형성을 주도해 나갔다.
이즈음 탁사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어 계속적으로 성서 번역 사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최초의 신학 잡지 ‘신학월보’(新學月報)를 창간(1900년)하였다. 그는 1902년 44세의 장년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미 감리회 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데, 이후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상동과 정동교회의 담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 5월 정동교회로 파송되어 1914년 5월 인천지방 감리사로 전임되어 갈 때까지 만 11년 동안 정동교회를 맡으면서 감리교회의 최초의 담임목사로서 지도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특히 정동교회 재임시 교회가 급성장할 정도로 효과적이고 영향력 있는 목회를 펼쳐나갔다.
탁사가 1902년 집사 안수를 받으면서 교회 목회가 주된 사역이 되었지만 탁사는 그는 교육과 종교를 통한 민족 개량과 근대화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1903년 전덕기 전도사와 함께 목회하던 상동교회 안에 친목회를 설치하고 이곳을 통해 민족계몽과 사회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어 탁사는 정동교회 안에 의법회(懿法會)를 만들어 민중계몽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1897년 조직되었다가 활동하지 못하던 감리교 청년운동단체,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의 재건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압력에 의하여 정동교회의 엡윗 청년회가 해산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탁사는 굴하지 않고 민족의 계몽, 교육을 위해 1904년에 의법학교(懿法學敎)와 몽양원(蒙養院)을 설립하여 국운의 도모하였던 것이다. 또한 탁사는 1903년 10월에 배재 협성회를 주축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어 그리고 의법회를 통하여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주영대사 이한응의 추도회를 주재하기도 했다. 탁사의 대(對) 사회영향력을 더욱 발전되어 갔다.
특히 황성기독교청년회는 탁사가 그 창립시기부터 회원과 임원으로 활약하면서 토론회와 강연회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승만 등의 독립협회 간부들이 감옥에서 나온 후 대거 YMCA 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탁사는 여기에서 공개 강연도 하고, 젊은이들에 대한 활발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갔다. 이런 대 사회적 역할을 통해 탁사는 기독교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의 지도급 인사로 부각되었다.
다음 해인 1908년은 융희 원년이다. 고종 황제의 폐위에 이어 순종 황제가 즉위한 첫 해이다. 당시 장안의 화제는 탁사 최병헌 목사의 ‘융희 강연회’(장학사 연설)이였다. 종로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있었던 이 대중종교 강연회에는 수많은 청중이 운집했고 연일 계속된 강연회의 연설 내용은 당시 2개 일간 신문인 황성신문과 매일신문에 전면 게재되었다.

선유사 활동과 탁사의 민족 계몽운동
 
1907년 8월, 정미조약 체결에 이어 군대가 강제해산을 당한 후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의병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부에서는 1907년 12월 의병을 선무하는 선유사(宣諭使)를 전국으로 파송하면서 탁사를 충청남도 선유사로 임명한 것이다. 선유사는 조선시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왕의 효유문(曉諭文)을 갖고 직접 백성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효유하는 특사로서 임무이다. 당시 선유활동을 정부에서는 수행 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일반 사회나 백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는 종교인들이 선유사로 선발한 것이다. 탁사는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입장에 서서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정부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신앙적 의식을 바탕으로 선유사 활동에 임하고 있음을 밝혔다.
탁사는 선유활동을 하는 동안 의병운동 지도자들을 만나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많이 하였는데 그 내용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국왕의 ‘효유문’을 나눠주며 정부 입장을 설명하는 것과 함께 현재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시국의 근본 원인이 정치지도부의 부패와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의병운동의 진의는 이해하지만 그 폭력적 방법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권회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민중계몽을 통한 의식개혁이 필요한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지방마다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의병운동을 달걀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행위라고 비판하고 대안으로서 인민 교화와 학교 교육을 제시하였다.
탁사는 다른 강경한 무장투쟁론자들과는 달리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운동을 의병운동과 같은 폭력적 방법을 거부하고 비폭력적 방법, 즉 종교와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1907년 충남 지역의 선유사로 임명되어 3~4개월 간 공직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이 사회 활동력을 말해준다.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하고 있는 당시 대(對) 국민 정책으로서 기독교의 지도적 인사를 추대하였다는 사실은 탁사의 유교적 지성과 기독교적 위상의 비중이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있었음을 보여준다.
탁사의 활동에 있어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선유사’ 활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유활동을 단순히 반(反)민족적 행위로만 볼 수 없다. 탁사는 민족운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 방법에서 무장투쟁운동보다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계몽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 민족 계몽 쪽에 관심을 가졌다.
항일운동에 있어서 박용만과 같은 기독교 인사들이 적극적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탁사의 경우는 애국계몽과 문명개화론, 그리고 기독교적 교육구국론에 확신을 가지고 민족구원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런데 탁사가 1909년 말 감옥에 갇히는 개인적 비극을 경험하였다. 결국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된 탁사는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전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이후로 탁사가 민족문제에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활동하기보다는 목회에 전념하고 교회성장과 학생지도에 관여하며 감리교 목사로서 목양에 힘썼다. 1910년 이후로는 사회참여적 설교나 활동보다 종교적이고 내면적인 신앙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부분은 탁사가 정동제일교회의 담임자의 위치를 지키고 목회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의도라 보여 진다.

맺는 말

 탁사는 1893년 2월 정동제일교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후 그에게 세례를 준 존스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탁사는 배재학당, 대동서시, 농상공부주사, 선유사, 그리스도인회보 주필, 황성신문 기자로 협성회, 독립협회, 의법(懿法)학교, YMCA 창립을 주도했다. 탁사의 구국운동은 당시 도탄에 빠진 우리 민족의 살 길을 제시하면서 기독교 민주사회와 남녀평등, 유신한 문명사회, 첨단과학문화, 선진국제사회로 나가는 길을 제시했다. 특히 탁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잃은 후 황성기독청년회를 통해 애국계몽 강연에 힘썼다.
종교와 교육을 통한 교화(敎化)가 조국의 근대화와 사회개혁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기독교 문명국가론’을 주장했던 탁사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애국, 기독교적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민족구원, 실력양성을 통한 기독교적 교육구국론을 제시하면서 민족구원을 향한 그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탁사는 당시 한말의 일제침략 현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항일민족운동이 전개되는 현실에서 비폭력 평화운동, 교육 중심의 민족계몽운동 노선을 견지하였다. 탁사는 사회개혁과 민족구원 문제는 정치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계몽과 종교운동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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