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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목적을 혼동해선 곤란하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대답을 재촉하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작금의 세상도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잘못을 따지고 비난하는 일에 앞장서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차 없이 손가락질을 해대는데 익숙해져 있다. 걸렸다 하면 이른바 ‘신상 털기’나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가는 여론의 움직임도 문제다. 그런 여론은 사실관계를 알아보려하지도 않고 나중에 틀린 것이 확인돼도 책임을 회피하는 뻔뻔함까지 보인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효과가 있었던 것은 양심이 그나마 살아있던 2000년 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세태에서는 돌을 들려는 무리가 아니라 끌려온 여인에게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나서라”는 말을 예수가 아니라 여인 즉, 죄인들이 더 뻔뻔하고 당당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9년만의 정권 교체이기에 후유증도 상당하다. 쌓여온 적폐를 청산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보복정치의 시비에서 자유롭기도 힘들다.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 진상을 정확하게 가려낸 뒤 엄격한 법의 적용이 따라야 뒷말이 적어진다. 아쉽게도 오늘 우리 정치 현실은 당위성은 인정되지만 적절하고 적법한 일인지를 묻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관계조차 못미더울 때가 있다. 심지어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이들 중에 적폐가 발견되는 경우까지 생기며 혼란과 시비, 갈등은 더 거세진다. 최근 벌어진 블랙리스트 논란이나 인터넷 댓글 조작 소동, 김기식 금감원장·안희정 충남지사의 낙마 같은 경우가 그렇다.
남의 허물을 들추는데 익숙하고 가차 없던 이들이 자기의 문제점이 드러나면 관행이라거나 정도의 차이를 들먹이며 빠져나가려 한다. 심지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라는 예수님의 고결한 말씀조차 인용하는 뻔뻔함을 드러낸다.
싸움을 즐기고 편 가르는 일에 익숙한 세태도 문제다. 사실관계를 따져보기도 전에 편을 먼저 정하는 이른바 ‘우덜리즘’이나 ‘내로남불’의 전형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행이나 관습은 과거를 말하는 것이고 그 내용이 도덕적이거나 공동의 가치로 유익할 때만이 미래로 확장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관습이나 관행이라 해서  어떤 허물이나 죄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악과의 싸움이 있다거나 당장 필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가려야 한다는 말도 어쩌면 우리의 교만과 위선을 포장하는 변명일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고 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선한 목적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되고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수단에 불과한 일을 목적처럼 착각해서도 곤란하다.
최근 기독교타임즈에서 불행한 징계가 있었다. 신앙인이라면 징계를 행한 이나 당한 이 모두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경영진의 책임이 크고 신문을 정상화하는 일에 철저한 내부 반성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함은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반면 징계를 받은 이들도 관행이라는 말로 허물을 포장하거나 비뚤어진 특권의식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십보 양보해 교단 신문도 언론의 기능이 우선해야 하고 비판이 필수적 기능이라 주장하려면 공정성과 객관성의 철저한 요구를 먼저 살펴야 한다. 또한 언론사 및 언론인 스스로 철저한 자기 검증으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보도의 책임과 비판의 자격이 주어진다. 기자라는 신분이 곧 무한한 권력처럼 행사되던 시절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언론의 독립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자기 안의 불법과 비리는 관행이라 넘어가면서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던 예수의 말씀 중에 놓치는 부분이 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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