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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조국의 광복을 불과 수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운명을 달리한 시인이 있습니다. 윤동주입니다.
그는 많은 詩를 남겼습니다. 자본주의의 기제(mechanism)인 탐심에 얽매였기 때문인지 그가 말한 ‘부끄러움’에 수긍이 갑니다. 시인은 세상에 없지만 그리움은 더해만 갑니다. 1939년 9월, 윤동주는 성찰적 언어로 자기 모습을 그렸습니다. 바로 「자화상」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1939.9)「자화상」 전문

시인은 논가 외딴 우물을 혼자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응시했습니다. 우물 속에는 가을이 흘렀습니다. 옅은 파동위로 추억처럼 서있던 자신을 바라봤습니다. 무서운 정념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불현듯 가엾어져 또 다시 우물가로 침잠합니다. 결국 가을이 내민 언저리에 고통스럽게 서 있는 자신을 마주했습니다.
단독성은 바로 ‘나’ 자신이며 ‘미워져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 위에 드러납니다. 단독성으로의 회귀야말로 생을 향한 유일한 여정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한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그의 책 「일방통행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대상이 되는 사물과 사람에게 희망이 존재하는 한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더 이상 어떤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스스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자기 곁에서 배회하는 걸 목격하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무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윤동주가 「자화상」이란 시를 통해 우물에 비친 대상에 주체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 지점이 바로 성서와 인문학의 교차점입니다. 우리는 윤동주의 우물을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구분 짓던 사적영역이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보편성을 위해서는 특수성을 죽여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샬롬(모두의 평화)을 위해 사마리아로 가셔서 그곳을 공적영역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이야기는 수가라고 불리던 동네의 한 우물을 둘러싸고 시작됩니다. 남들은 결코 오지 않을 시간에 한 여인이 우물가를 찾습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은 논가 외딴 곳을 빙빙 둘러 우물을 찾던 「자화상」의 그 사나이와 무척 닮았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여인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사나이의 발걸음 따라 여인도 한낮에 우물을 찾아갔습니다. 물을 긷기 위해 몸을 숙일 때면 파동 속에 펄떡이던 미움과 그리움이 한 인간을 집어삼키곤 했습니다. 타는 목마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순간,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사람을 두려워하던 수가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희망의 자화상입니다. 윤동주는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오마주(hommage)를 생각해낸 것 같습니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물에 비친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련, 한낮 태양 속 박명(twilight)의 역설을 인내할 수 있는 고독, 논가 외딴 우물로 향하는 일방통행과 끊임없이 펼쳐진 우회로, 미움, 가엾음, 또 그리움을 두 손 가득 퍼마시며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고독, 또 고독, 그러나 거기 어디쯤 기쁨의 오솔길들이 놓여 있음을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롭게 그려내야 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요.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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