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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수단

성도로 부름받은 공동체인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그 크고 깊은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는데 있어서 ‘길’과 ‘방법’이 필요하다. 서울로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잘못 된 길로 들어선다면 옆으로 가거나 반대방향으로 갈 수 있다. 길 떠나는 사람에게 가장 우선적인 일은 어떤 길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선택하는 일이다. 물론 탈-현대인들은 미리 자신이 가야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네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길을 떠난다. 그러나 출발하기 전에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어떤 노선인지 알고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하여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길, 통로를 알아야 한다. 즉, ‘은혜의 수단’을 알아야 한다. ‘은혜의 수단’이란 무엇일까?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을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어떤 외적 표, 말, 혹은 행위들”로 규정하면서 “내적 은혜의 외적 표이며 내적 은혜를 받는 외적 수단”이라고 가르친다.(설교, “은혜의 수단”, II,1) 은혜의 수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외적인 수단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진정한 영광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들이다. 웨슬리의 설교, “은혜의 수단”(The Means of Grace)를 중심으로 은혜의 수단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려고 한다.
 
주요한 은혜의 수단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 중에서 주요한 수단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기도, 성경탐구, 성만찬이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혜의 수단의 주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은밀한 기도나 대중과 함께하는 기도, 성경 연구 성경을 듣고 심사숙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주님의 성찬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은 첫 번째로 기도로 대망해야 한다. 기도의 수단을 사용할 때는 끈질기게 구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약1:6)는 말씀과 같이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성경을 탐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으로 성경을 탐구해야 한다. 성경 탐구에는 성경 듣기, 읽기, 묵상하기가 포함된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으로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탐구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참여해야 한다. 즉,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자신을 순종하는 자가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아닌가? 살펴야 하고, 의심을 없이 한 다음에 그 떡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한다. (III,1-12)

은혜의 수단의 올바른 사용
은혜의 수단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은혜의 수단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않는다. 어떤 수단이든지 거기에 무슨 고유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기도, 성경읽기, 성찬의 떡과 포도주 자체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없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이 수단들을 통하여 복된 것들이 우리의 영혼에 전달된다. 웨슬리는 “모든 좋은 선물의 부여자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은혜의 수단이 잘못 사용되는 실제적인 예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로 은총의 수단이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 종교의 목적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무익하고 공허한 것이 된다. 두 번째로 은총의 수단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분리된다면 이 수단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사랑을 증진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II, 2-3)

은혜의 수단 사용 순서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순서를 제안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은 특정 순서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에서 특정한 순서를 정하여 지키라는 명령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듣고 읽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일”로 제안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확인하기 위하여 성경을 살피기 시작하고 듣고 읽을수록 더욱 더 확신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즉, 기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신음일지라도 기도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서 회중 가운데서 믿음이 깊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성찬 상에 나아가는 것을 본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라서 성찬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주저하는 마음과 싸우다가 성찬으로 돌파해 나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명상하고-기도하고-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V, 1)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자세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수단을 뛰어 넘는 분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도 은혜를 전달하실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은총의 수단에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한다. 둘째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수단 자체는 아무 힘도 없음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또한 수단의 사용 행위에는 어떤 공로도 없다. 우리가 수단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경우에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수단의 행위에 집착하면 모든 것이 헛된 수고가 됨으로 수단의 행위 자체에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은총의 수단을 단지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한 뒤에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잇는지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스스로 기뻐하고 있지 않은지 조심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기뻐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독으로 바뀌고 만다. (V,3)

식별과 적용

얼마전 목회자들과 함께 웨슬리의 표준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다. 이 모임은 웨슬리의 설교를 공부하는 자리인데 모임의 마무리는 성만찬이었다. 몇몇 그룹이 있었고 그룹의 리더들이 미리 모여서 각자 자신들이 인도할 작은 공간들을 성경공부와 성만찬을 위한 준비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주어진 공간 안에 있는 책상과 의자들을 바꾸면서 삼위일체가 생각이 났고 책상과 의자를 전체적으로 삼각형으로 만들었다. 성찬상 위에는 십자가와 성찬을 위한 잔들이 놓여 졌고 작은 사과와 토마토도 세 개씩 올려놓았고 철쭉꽃도 세 가지 색의 꽃을 올려놓았다. 성찬상 뒤에는 부활절을 상징하는 배너를 크게 걸어 놓았다.
웨슬리 설교에서 “은혜의 수단”을 중심으로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마치고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성찬을 나누었다. 모든 모임을 마친 후에 한 목사님께서 질문을 던지었다. “성찬상을 이렇게 장식하게 되면 일부 교인들은 장식되어진 것들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장식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오랜 전에 홍콩에서 중국 신학교의 교수가 하였던 말이 생각났다. 중국의 소수민족의 마을은 기독교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배가 아프면 성경으로 배를 문지르고 치통이 일어나면 성경으로 얼굴을 문지른다고 하였다.
수단이 수단에서 머무르지 않고 수단이 수단을 넘어설 때 수단은 우상화될 수 있다. 떡과 포도주, 십자가, 배너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임을 명료화 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가 말하였듯이 떡과 포도주는 물질로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상징”(symbol)이다. 상징은 실재에 참여하면서 실재를 드러내지만 실재의 전체는 아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를 드러내지만 예수의 살과 피를 전체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상징과 실재의 차이를 간과할 때 왜곡된 신앙이 생겨질 수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 신학자 로아지(Alfred Loisy)는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이었다”고 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데,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로 보인다. 교회는 수단/도구이어야 하는데, 목적이 되었다. 목적과 수단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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