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한국 감리교회의 아버지 H. G. 아펜젤러와 그의 죽음을 상기(想起)하며②김낙환 목사. 교육국 총무

아펜젤러의 추도식(追悼式)에서

1902년 신학월보(神學月報) 7월 호에 세계의 감리교 선교부들과 선교사들이 소식을 싣는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조선 선교부의 H.G. 아펜젤러 목사가 1902년 6월 11일에 조선에서 익사했다. 그는 1885년 봄 이래, 조선에서 선교사로 지냈다.

사고 이틀 후인 6월 13일 정동교회에서는 아펜젤러와 조한규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추도예배(追悼禮拜)가 열렸다. 이날 교우들 1000여 명이 모여 갑자기 날아든 아펜젤러의 죽음이라는 비보(悲報)에 놀라고 슬픔을 같이 하였다.

1902년 6월 24일에도 추도식이 오후 2시와 4시에 열렸는데 2시 추도회에는 배재학당의 교사들, 학생들, 아펜젤러 씨의 친구 되시는 분들과 그리고 조한규씨의 지인(知人)들이 참석하였고, 4시 추도회에는 각국의 공사(公使)들과 각처의 선교사들과 국내외 귀빈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배재출신 전도사 노병선 씨는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우리가 이제 아무리 아펜젤러 씨에 관한 말을 길게 하여도 쓸데없을 것이고, 다만 위로될 말은 우리도 예수를 단단히 믿고, 아펜젤러 목사와 같이 구주를 위하여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복음 전파 사업을 많이 하고, 이후 천국에서 기쁘게 아펜젤러 씨를 만나보고 왜 세상에서 일 더 아니하시고 먼저 왔느냐고 물어 봅시다.”

 

또 같은 해 8월 「신학월보(新學月報)」에는 아펜젤러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다음과 같은 조사(弔詞)가 실렸다.

 

“서울의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당장(堂長)으로 17년간을 지내다가 금년 연회에서 남방 지역 감리사로 선정된 아펜젤러씨와 교우 조한규 씨가 성경 번역 차 금년 6월 11일에 일본의 여객선 웅천환(熊川丸-키소카와마루)을 타고 목포로 향했다. 그날 밤, 십일 점 종 이십분에 칠산 외양, 어청도 근처에 이르니 해상에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때 목증천환(木曾川丸)이란 배를 만나 피할 겨를 없이 서로 마주쳐 구마천환이 파선하여 2분 내에 만경창파에 침몰했다. 그 때에 내외국인 중에 익사자가 많은데 그 중에 장로사 아펜젤러 씨와 조사 조한규 씨와 여학생 한 명의 영혼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그 파선할 때의 소문을 자세히 들으니 구마천환에 있던 선객들이 갑판으로 올라와 목증천환으로 건너가려하다가 누구를 부르며 다시 내려가려고 하는 모습이었다고 목격자들이 전한다. 그 정황을 생각해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경망 중에 자기가 먼저 올라왔지만 조형제와 학생을 구원하고자 하다가 자기 생명까지 버렸으니 무정한 바닷물이 아펜젤러 목사의 사랑하는 뜻을 어찌 알리오. 우리가 사랑하는 아펜젤러 목사는 고국을 떠나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일가와 친구도 멀리하고 수만리 타국에 나아와 무한한 고생도 하며 비방을 만나기도하나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고 우리 조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고자 하여 17년 동안을 열심히 전도하다가 필경은 자기 몸까지 형제를 위하여 버렸으니 거룩하도다. 아펜젤러 목사여! 참 죽을 때 죽어, 구세주 예수를 본받으셨도다.”

 

배재학당에서는 아펜젤러의 순직 1주년이 되는 1903년 6월 16일 (기일-忌日은 6월 11일), 500여명의 교직원 학생, 그리고 교계 유지들이 모여 추도예배를 드렸다. 추도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그를 잃은 슬픔과 허전함을 경험하였기에 그 자리에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그의 아내는 아직 젊었고, 자녀들도 아직 어렸다. 1남 3녀 중에 큰 딸 애리스는 17살, 외아들 헨리는 13살, 둘째딸 아이다는 11살, 그리고 막내 메리는 9살이었다. 이들이 아버지의 선교 사업을 계승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물론 그들은 성장한 후에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선교, 교육 사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앨리스와 헨리는 아버지와 같이 양화진에 묻혔다.

그 날 추도식에서 배재학당 교직원들과 제자들은 한문(漢文)으로 쓴 로 추념문(追念文)을 그의 영전(靈前)에 남겼다. 물론 아펜젤러의 업적(業績)과 공로(功勞)를 담기에는 부족하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글은 배재 고교 한문 교사 성교진이 번역(飜譯)한 것이다.

 

고(故) 아펜젤러 선생 추념기(追念記)

오직 아펜젤러씨는 북미합중국에서 나서 우리 조선으로 와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할 것을 권장하고, 기독교를 펴고 영재를 얻어서 교육함에 배재학당을 세웠고 을미년의 월보에 글을 서술하야 군신의 대의를 밝혔고, 협성회를 부식(扶植)하여 국민 개화의 희망을 불어주었고, 말년에 이르러 때마침 복음을 번역하는 책임을 맡아 광무(光武) 6년 11일, 즉 음력으로 임인 년(壬寅年) 5월 6일에 인천에서 목포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끝내 불귀의 객이 되시니 이분이야 말로 그 도(道)를 다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더욱 돌아가시게 될 때에 혼자 살아나실 수 있는 형편이었는데도 삶을 택하지 않으신 것은 조성규씨가 오랜 친구요, 또 이번 행차(行次)에 배를 같이 탔으므로 건져 주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 분이 기독교에서 남을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는 큰 뜻을 잘 지킴이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하랴.

 

추도예배를 볼 때에 5백여 명이 모였는데, 소리 내어 울지 않는 남녀가 거의 없으니 그가 보통 때 교화하여 사람을 감화하게 한 것과 말과 행동의 착함이 사람 마음속에 깊이 파고든 것을 짐작할 만하다.

이에 교원(敎員)들과 학생들이 추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여 교당(敎堂)에 모여 잊지 못한 정(情)을 붙였다. 또 액자를 걸어 학당의 기념으로 하고자 나에게 부탁하거늘 나도 이 학당에서 영문을 배운지 여러 해 되는지라 그 의리에 느끼고 그 정을 생각하여 먼저 가신이의 명이 바름을 대략 서술하노라. 오, 슬프도다.

 

대한(大韓) 광무(光武) 7년 6월 16일

주님 강생(降生) 1903년 6월 16일

최병헌, 송기용, 이무용, 정교, 유재호, 양홍묵, 여병현 김원근, 윤창렬, 이익채, 노병선, 이승만, 문경호, 민찬호, 시천, 계작, 정태응, 윤승렬, 윤정수, 윤성렬, 유민종, 양금묵, 김전, 김흥수, 유옥겸, 민영덕, 장용남, 김영극, 문명진, 송언용, 남궁염.

 

나가는 글

아펜젤러는 1887년 조선선교사업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1892년 안식년이 되어 휴가차 귀국할 때까지 이 중요한 직책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감당하였다. 처음에는 낮은 문화 수준과 은자(隱者)와도 같이 격리된 채 암흑과 무지 속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대중들 속에 묻혀 선교 활동을 벌이며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고 그때마다 원만하게 해결하여 나갔다.

그가 헤쳐 나가야 했던 주위의 신체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여건들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직면해야 했던 장애물들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가 수행하여 할 과제는 그와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당시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고 교과서도 없었던 상황 아래서 조선어를 배워야 하였고, 또한 외국인이라면 공연히 경원(敬遠)시하고 미워하는 이 나라 사람들과 타협하여야만 하였다. 당면한 온갖 장애물들은 오직 인내와 능력 그리고 고매한 성품(性品)으로 극복 되어졌던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였고, 선교사로서 대부분의 경력을 학당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에게는 우선 사람들이 감리교회에 귀의(歸依)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필수적이었다. 그는 문예에도 재질이 있어서 조선 말로 글을 썼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공공사회 단체에도 많이 참여하여 연합교회, 조선성서공회, 사회서울연합회, 공동묘지연합회, 아시아학회 조선 지부등과 같은 단체의 발기(發起)위원이 되었다. 사실상 그는 점차로 이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모든 면에 호흡을 같이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로서 그는 다(多) 방면으로 여행을 하였고, 또한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구석구석을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팔도강산을 차례로 방문하였고, 조선인들이 처한 제반 여건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인부들도 하던 일손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하였고,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지식인들도 그의 박식(博識)함과 교육에 대한 열의를 존경하였다. 명문 귀족들도 그와 친교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였다. 대신(大臣)들도 그를 조선인들의 진정한 친구로 여겼으며 여러 번 황제를 알현하였고, 또 황제와도 대화를 나누었다. 동료들과 손을 잡고 「조선 보고지(The Korean Repository)」를 공동으로 편찬하였는데 전질 5권으로 이것은 1902년까지 영어로 쓰인 조선에 관한 중요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인생과 가르침은 조선 교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조선인들을 위하여 살았고, 조선인들을 위해 일하였다. 조선인들은 그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또한 깊은 애정으로 그를 대하였다. 그들 자신들의 믿음의 아버지로 여기는 수백 명의 신도들이 평생토록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기억 속에 간직한 채 한반도 전역에 흩어졌다.

선교 사업에 있어서도 업무에 필요한 모든 직책들을 맡아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한때 선교부 총 관리자, 학당장, 선교부 회계, 감리사, 저술가, 번역가 등을 두루 거쳤다. 선교사로서 그는 정열적으로 일하였으며 또한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마지막 노력도 오직 조선인을 돕고 걱정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조선 사람과 불운했던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였다. 그를 삼킨 바다는 말이 있을리 없고 그의 조촐한 무덤이나 마련하고 싶은 우리의 소망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우리는 단지 그의 회색 머리칼을 누르고 있는 짜디짠 바닷물만이 우리가 사랑하던 형제의 몸을 휘감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그는 이제 그의 안식처를 표시해 줄만한 조각 비문이나 장식도 없이 어둠의 쓸쓸한 바다 속에 잠들어 있다. 그의 안식처는 숙명적인 인간이 잠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무덤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 마음속에 그가 심어 준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후세에 장엄한 기억을 남겼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것을 남겼다. 그가 도왔던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신을 도덕적 선으로 투사시켰고 이것은 아직도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이제 종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달콤하고 낭낭한 여운은 아직도 그가 가르치고 살찌운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