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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제일, 건물 안에 새겨진 ‘115년 믿음의 이야기’수원 이남 최초 감리교회인 공주제일교회
등록문화재 넘어 기독교박물관으로 재탄생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인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시는 공주를 관광하는 여행객들에게 주요 명소 일곱 곳을 꼽아 ‘소문난 칠공주’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부여했다. 효심공주, 재미공주 등 각기의 이름이 붙은 명소 중에 ‘제일공주’라 이름이 붙여진 곳이 있는데 바로 공주제일교회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 가운데 교회가 들어간 까닭은 무엇일까.

공주제일의 태동
공주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사람이 자신들의 돈으로 직접 지은 공주 최초의 서양식 교회인 동시에 수원 이남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감리교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시작은 116년을 거슬러 올라가 1902년에 시작된다. 1902년 파송된 배재학당 출신의 김동현 선교사가 초가예배당 한 칸을 구입해 예배를 드린 것이 공주제일교회의 출발이었다. 당시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지나는 교통의 요지요 관문이었던 공주에 지어진 공주제일교회는 문헌상으로 수원 이남의 첫 감리교회로 기록된다.
김동현 선교사를 이어 공주에 온 이는 맥길 선교사였다. 의료선교사였던 그는 이용주 전도사와 함께 초가 두 동을 얻어 예배를 드리고, 병든 이들을 볼보는 의료사역을 펼쳤다. 덕분에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었다.
맥길에 이어 공주제일교회의 새 담임자가 된 샤프 선교사는 갓 결혼한 새신랑이었다. 신혼의 꿈과 선교의 꿈을 안고 온 공주에서 샤프 선교사는 파송 6개월도 못되어 장티푸스에 감염돼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국으로 떠난 부인 사애리시 선교사는 남편의 못다한 사역의 꿈을 마음에 품고 2년 뒤 다시 한국을 찾는다. 평생을 한국에서 선교하리라 마음먹은 사애리시 선교사는 일제의 선교사추방령으로 인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그녀가 세운 공주 근대교육의 시초인 명선여학교를 통해 이 땅에 탄생된 유관순, 최초의 여성장관 이명신, 최초의 여성목사 전밀라, 노마리아 경찰서장 등 여성인재들은 그녀의 삶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 맺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주는 물론 충남일대의 모교회인 공주제일교회는 그렇게 영혼구원과 의료, 교육, 사회복지 등을 통해 전인적 구원에 힘썼다.
공주제일교회는 또 공주지역의 독립운동과 만세운동의 중심이었는데 유관순은 이화여고에 가기 전 영명에서 2년 동안 공부했다고 공식 기록에 남아있으며, 공주만세운동 당시 예배당에서 태극기 1000장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민족대표 33인중에 신홍식 목사와 독립운동에 힘쓴 현석칠 목사는 공주제일교회의 담임자로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나라를 되찾는 일에도 교인들과 함께 앞장섰다.

건축 이야기
공주제일교회는 맨 처음 초가 한 동, 다음엔 초가 두 동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에 이어 교회의 부흥과 함께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1907년 교인들이 350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새 예배당을 지어야 했지만 먹고 사는 것도 어려운 형편에 교회건축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을 때, 우산을 손에 든 한 신사가 예배를 마친 뒤 목사관을 찾아와 그때 돈으로 6800원(현재 7억원 가량)의 헌금을 무명으로 바치면서 예배당이 지어졌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그를 기리기 위해 좁을 협狹에 우산 산傘을 써 ‘협산자 예배당’이라 이름 붙여진 기역자 예배당이 그렇게 지어졌다.
이후 1931년 공주제일교회는 새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각종 고초를 당하던 때였으며, 세계적으로는 경제공항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였다.
성도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교회건축을 위해 기도하던 성도들은 “우리 손으로 교회를 짓자”며 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어려울 때였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논과 밭을 팔아 바치는 교인들이 생겨났다. 교인 중 지루디아(지누두) 권사는 2만평이 넘는 땅을 교회를 위해 내놓기도 했으며, 홍루디아 성도 역시 논과 밭을 봉헌했다.
1931년 2층 연화제 양식으로 지어진 공주제일교회의 새 예배당은 인근의 명물이 되어 교회를 구경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 건물은 기역자 예배당 형태를 벗어나 남녀 평등의 1자 예배당으로 건축됐다는 특징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여전히 남여가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500명이 예배할 만큼의 큰 규모의 이 예배당에서는 감리교회의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예배당, 문화재가 되다
오랜 압박의 세월을 지나 해방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인민군에 의해 공주가 점령되고 공주제일교회는 인민군의 보급창고로 사용됐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연합군의 폭격을 맞으며 성전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성전 내부가 부서졌으며 모든 비품이 파괴되어 외벽만 남은 교회는 폭격을 맞고 6년이 지나서야 복원이 이루어졌다. 교회를 처음 건축할 때도 어려웠지만 전쟁이 끝난 뒤 누구나할 것 없이 먹을 것도 부족할 때에, 예배당을 재건하기 위해 금비녀와 가락지 등을 바쳐졌고, 한 성도는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금덩이를 내놓기도 했다.
돈만이 아니었다. 파괴된 성전의 잔해를 치우기 위해 지게를 지고 새 벽돌을 찍어 교회복원에 한 마음으로 힘을 쏟았다. 교회가 복원되고 단단해져가는 만큼 성도들의 신앙도 견고해졌다.
공주제일교회는 이 예배당을 1979년 다시 한번 개축하는데. 이 때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인으로 불리는 이남규 교수가 이를 담당해 예술적 가치를 더하기도 했다.
긴 시간, 힘겹게 그러나 감사함으로 성도들의 신앙과 함께 세워지고 고쳐진 공주제일교회의 예배당은 지금 등록문화재 472호로 등록되어 있다. 교회 100주년을 맞아 기념 예배당을 짓기 위해 건물을 헐기 전 이 건물의 보존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의뢰한 것이 단초가 됐다. 문화재로 등록되기에는 역사도 짧고 개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가치가 훼손됐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오히려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문화재를 두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공모전에 프로젝트가 당선되면서 역사 속 건물이 공주의 기독교박물관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공주 기독교박물관
1902년부터 현재까지 교회건물과 함께 해 온 공주제일교회와 이 지역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담긴 공주 기독교박물관. 건물에 들어서면 십자가와 성령의 비둘기로 디자인된 스테인드 글라스의 빛이 예배당으로 스며들고 그 안에서 지난 115년의 역사가 다시 살아숨쉼을 느끼게 된다.
옛날 예배당의 모습 그대로를 복원한 모형예배당과 당시의 자료들, 샤프 선교사가 사용했던 오르간도 만날 수 있다. 주제별로 나뉘어진 6개의 방에서는 시대별로 시대를 이끌어간 목회자와 교회의 활동이 오래된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영상을 감상할 수도 있다. 당시 사용했던 회계장부, 세례인.입교인 명부 등 귀한 자료들도 전시됐다.
특히 사애리시 선교사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던 교인들의 후손에 의해 선교사가 직접 사용했던 장롱과 장식장, 경대, 그릇 등도 볼 수 있다.
박물관 외벽에 그려진 사애리시 부인과 유관순이 함께 그려진 벽화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영명학교을 시작으로 선교사의 집, 기독교사회복지관, 공주제일교회를 잇는 유관순 길을 걷는 것도 좋다.
공주제일교회 윤애근 목사는 “성막부터 헤롯까지 이어지는 1300년의 역사가 우리교회의 110년 역사와 오버랩된다”면서 “하나님의 섭리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문화재 박물관이 된 공주제일교회를 꼭 오시기 바란다”며 우리를 초대했다.

공주기독교박물관은 오는 30일 오후 2시 개관식을 갖는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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