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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 아래서


<시인과 촌장>의 노래들은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무구하며 상상력 뛰어난 노랫말과 가공되길 거부하는 멜로디 등 가히 명곡을 위한 모든 요건을 갖췄습니다. 저들이 만들어내는 노래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고, 들려져야 할 숙명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하덕규가 써내려간 가사들은 하나같이 직조된 사유를 넘어 그 위에 흐르는 친근한 영감이 묻어납니다. 다분히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가사지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하지만 무게감이 있습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그가 어쩌면 저리도 차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왔기 때문에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이 듣더라도 감동을 받는 것 같습니다.

예술은 삶에 침잠하여 철저히 관조하며 자기 혁명을 통해 세상에 등장합니다. 하덕규 스스로 속세의 그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프로메테우스, 코카서스 바위의 쇠사슬에 묶여 영원히 결박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종의 시도를 음악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실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방향에 방점을 찍고 더 나은 것, 더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자기혁명. 데가주망(dégagement)이 그에게 있었던 듯싶습니다.
 
<푸른 돛>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엉겅퀴 꽃씨가 저리도 날리니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어
친구 다시 꿈을 꿔야 할까 봐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솜처럼 지친 모습들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 드높으니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 봐

억척스럽게 살아온 사람들, 푸른 돛을 올려야만 하는 삶은 서럽기까지 합니다. 그는 시인처럼 노래를 통해 질문하고 답하길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의 질문도, 답도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영원한 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귀화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를 작품(poiema)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의 바탕, 그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시인과 촌장>의 명곡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옛 과거처럼 어딘가를 배회하는 영혼들에게 겸손한 구도자로 흐르고 있습니다.
 창조란 전에 없던 것을 빚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 안에 있는 그리움과 쓸쓸함을 헤아리셨습니다. 꼭 시인처럼 말입니다. 마치 시인이 시를 짓듯이 인간을 섬세히 지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은 고됩니다. 죄로 인해 젊음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무리 없이 경작하는 건 무척 수고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시엉겅퀴를 산물로 내는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하늘이 어둠에 잠기는 짧은 순간에 어슴푸레함과 반짝임은 동시에 생성되고, 또 소멸됩니다. 이 순간을 박명(twilight)이라고 합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어둠과 빛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박명과 인간의 운명은 서로 닮았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유한함에 갇혀 신음하는 인간과 박명은 슬픈 얼굴입니다. 활활 타올라본 적이 없어서 잿더미조차 되지 못한 채, 한 순간의 그을림 속으로 사라져간 박명을 햇살 가득한 이곳에서 생각합니다. 이 운명적인 역설 속에서 우린 절망 대신 또 다른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인생은 창조의 신비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창조주가 풀어내시는 빛의 솜씨를 검게 타들어간 박명 아래서 기다립니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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