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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적 해결능력, 도저히 없는 것인가?이후천 목사, 협성대 교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명언 중엔 이런 것도 있다: “미친 짓이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말을 우리 감리회에 적용해 보면 미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듣게 되는 그런 것과는 정반대 의미에서 우리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회법 소송을 통한 정의실현이 그것이다. 사회법이 일정부분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억울하니 갈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최근에 사회법을 집행하는 최고기관이 ‘판결거래’ 시도 의혹에 빠져 있다고 할지라도 가야만 되는 상황이면 갈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재판과정이 기초사실과 법리다툼보다는 수적우위 싸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법으로 가는 것을 말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사회법 패소시 출교라는 장정의 조항신설은 지나치게 나간 점이 있다고 본다. 그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재판과 관련하여 우리 내부의 엄격한 제도적 정비와 집행을 위한 공론화 과정이 선행되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무엇보다 법 제정 이후에도 사회법 소송이 중단되지 않는 게 그렇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도저히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매번 우리가 사회법에 의존하여 판단을 받음으로서 교회의 핵심가치들 중 하나인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시키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가?
이 상황에서 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이것도 우리 감리회에 적용해 보면 개인 소송 선택의 자유가 극대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웬만하면 사회법으로 가겠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샌델은 그런 식으로는 감리회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리회가 좀 더 나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제점이 있으면 회원들이 함께 고민해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결정 과정 중 타자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려는 태도와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공동체가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고민하라는 것과 타자의 이견 수용문화 조성이 그것들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 감리회의 공동체 운명과 정의실현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이견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과 대화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아쉽다는 대답이다. 우리에게는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와 같은 다층적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회를 통한 권력구조 형성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 대화문화를 위한 커리큘럼이나 훈련의 과정이 미진하다. 이견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타협하게 하고 조정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
여기서 물론 우리가 교육을 잘 해서 감리회에 소송이 중단될 정도로 공동체의 올바른 의견들이 제대로 개진되고, 대화문화가 꽃을 피우고 하는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정의실현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회의 정의론에는 정말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 결핍이 그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흔히 하나님의 정의 혹은 공의라 선포되고 있는 위와 같은 정의론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고, 오히려 교회가 세속주의에 오염되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그의 저서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에서 밝혀놓은 바가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바로 용서함의 여부이다. 시편 99편에서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기”도 하시지만, “용서하신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사회의 정의론에서는 죄에 따른 벌에 방점을 두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용서하시는 것이다. 다윗을 용서하신 하나님이 바로 정의의 하나님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인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의 정의개념을 하나님의 정의 개념과 혼동하여 교회에서 사용함으로서 사회법에 우리의 공동체 운명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의를 말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인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소송난마의 시대에 ‘용서함’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와 신학교육, 교회학교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적 대화 속에 ‘용서’가 이슈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에로의 전환 없이 감리회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소송으로 가져가 판결로서 정의를 세우고자 시도하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정의가 회복되기 위해 용서하는 마음으로 전환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정의론을 세상에 안내해야 하는 감리회가 사회 정의론의 지침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서울 지도에서 부산 주소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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