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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교회의 사명으로서 선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은 선교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은 예수의 지상명령이며, 이 길은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구체화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성도로 부름 받은 공동체이고, 성도로 세움 받은 공동체이며, 성도로 보냄 받은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사역을 위해 성도로 보냄 받은 공동체는 전도, 봉사,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회신앙고백>의 6조는 교회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의 본질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백하며,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는 예배와 친교,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로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친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친교만이 아니라 성도들과의 수평적인 친교를 포함하는 이중적인 친교가 이루어진다. 교회는 교육과 봉사를 통하여 성도로 세움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성도로 보냄 받은 공동체가 된다. 감리회신앙고백은 봉사와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중요한 사명으로 고백하고 있다. 선교가 지향하는 지향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의 열매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선교만이 아니라 전도와 봉사의 궁극적 지향점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그러나 세분하여 생각하기 위해 전도와 봉사와 선교를 분류하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통전적 선교
선교학자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선교는 복음주의적 선교와 에큐메니칼 선교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복음주의적 선교는 개인적 회심을 목표로 하며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초점으로 삼는다. 이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구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인적인 회심이 이루어지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상상하여 보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전 세계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까? 사회적 제도와 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제도, 구조에 의하여 삶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윤리적일 수 있지만, 사회가 비도덕적이면 인간은 윤리적일 수 없음을 지적한다. 구조악이 존재하는 불의한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무리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여도 사회의 구조악으로 인하여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구조악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 회심에 집중하는 복음주의적 선교와 다르게 에큐메니칼 선교는 개인적인 회심보다는 사회 참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즉, 개인구원보다는 사회구원을 강조한다. 죄는 개인적 죄와 사회적인 죄로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개인적 죄만이 아니라 사회적 죄도 해결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죄는 사회적 불의, 모순 등 사회적인 문제를 의미한다. 예수도 구조적 모순과 악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은 성전정화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안식일 논쟁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구약의 구원사건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사건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사건으로 읽어가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지적처럼 사회적 구조악의 극복 없이는 도덕적 개인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선교학자들은 복음주의적 선교와 더불어 에큐메니칼 선교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부 선교학자들은 복음주의적 선교와 에큐메니칼 선교를 통전하는 통전적 선교를 올바른 방향으로 제시한다.

통전적 선교는 ‘온전한 복음’을 지향하며 온전한 복음은 전도와 치유와 인간화와 해방과 사회 변혁을 모두 포함한다. 통전적 선교는 WCC의 나이로비 대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세계의 상황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적 선교가 전통적인 선교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선교와 복음주의 선교를 통전하는 통전적 선교를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통전적 선교는 개인의 회심과 영혼 구원을 우선시하는 복음주의자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를 위한 인간화와 해방을 선교로 보는 에큐메니칼 선교를 상호 배움과 상호 협력으로 수렴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_ 삼위일체

기독교의 확산
기독교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어떻게 전해져 점점 이 세상에 전파되었는지에 대하여 웨슬리는 <성경적 기독교>라는 설교에서 말하고 있다. 옛날의 기독교인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사람에게 선한 일을 행하려고 힘썼으며, 흑암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복음이 퍼져 나가면서 전파될수록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한 해독/박해가 일어났다. 치욕과 비난을 받았고, 자기 소유를 빼앗긴 자들도 있었으며,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고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셨다. 결국,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생활로 보여 주었고,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인내하였다. 웨슬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이 땅 위에 전파되었다.

결국, 웨슬리가 그려주고 있는 기독교의 확산은 개인적인 차원/선교에 집중하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의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확산의 과정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이지만, 사실 이 사건은 유럽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가 유럽을 넘어서 전 세계로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과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였던 정치적 식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서구의 기독교는 정치적 식민주의와 손을 잡고 식민지에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식민지에서의 선교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는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와 병원을 통하여 많은 선교가 이루어졌으므로 이러한 선교도 역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선교로 읽어가야 한다.

기독교 확산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선교를 돌이켜 보면, 개인적 지평만이 아니라 구조적이 지평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선교학자들이 제시하는 두 갈래의 선교가 현재의 세계적인 기독교를 낳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복음주의적 선교만이 아니라 에큐메니칼 선교를 함께 아우르는 통전적 선교를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해외선교로서 글로컬 선교
해외 선교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아직도 뜨겁기만 하다. 그러나 해외선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방적인 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선교지의 전통, 문화, 관습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기독교의 복음과 문화를 이식하려는 일방적인 선교가 지배적이기만 하다.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던 복음은 유대 땅을 벗어나면서 헬라화 하기 시작하였고, 로마로 들어가면서 기독교는 로마적 기독교가 되었다. 토착화가 이루어져서 토착적 기독교를 형성하였다. 글로컬(glocal)은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의 합성어로서 세계화와 지역화, 보편성과 지역성(특수성)을 아우르려는 시도이다. 세계화가 지역의 특수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측면, 지역화가 보편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측면, 이러한 두 가지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면서 세계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보유하려는 시도가 글로컬이다.

해외선교도 복음이라는 보편성과 선교지의 지역성을 아우르는 통전적인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 로마의 기독교가 로마스러운 기독교가 되었듯이,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적인 기독교가 되어야 하고, 동남아시아의 교회는 동남아시아다운 기독교가 되어야 함으로 글로컬 선교가 해외선교의 방향타가 되어야 한다.

식별과 적용
선교에 있어서 에큐메니칼 선교보다는 복음주의 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개인적인 결단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도 변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 생명, 평화가 사회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아직도 개인적인 차원의 전도와 복음주의 선교에 집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회적 구원에 대한 인식의 결핍이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기도하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가능한 나라로 생각하면서 개인적인 결단에만 집중하고 있다. 즉, 사회적 구원보다는 개인적 구원에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가 제시한 구원의 여정인 선행은총-칭의/신생-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있어서도 사회적 차원은 성화, 즉 사회적 성화에만 집중한다. 성화만이 아니라 칭의와 신생에 있어서도 ‘사회적 칭의’ ‘사회적 신생’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더 나아가서 사회적 선행은총, 사회적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생각과 담론들이 꽃을 피울 때 사회적 구원은 자연스럽게 지평이 확대되고 복음주의 선교와 에큐메니칼 선교를 아우르는 통전적 선교가 무르익어 가리라 기대된다. 온전한 선교를 위하여 이 시대 웨슬리의 후예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사회적 선행은총, 사회적 칭의, 사회적 신생, 사회적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실천이라 생각한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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