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목회단상
하나님 없이 목회하고 있다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포스트모던시대의 다원주의 경향은 타자성을 긍정하는 ‘타자성의 소멸’을 가져왔다. 그때부터 교회와 크리스천은 다른 방법으로 기독교의 차별성을 드러냈는데 긍정성의 과잉이었다. 긍정성의 과잉은 이유를 막론하고 편 가르기로 나타났고 자기편은 무조건 긍정하는 현상을 낳았다. 아무리 잘못 하더라도 내부는 잘못을 지적할 수 없고 불의에 대한 내부자의 고발은 배신으로 규정됐다.

교회도, 목사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라인을 따라 목사들의 세상도 재편된다. 심지어 줄을 잘 서면 자기 편 선배의 배려로 좋은 임지로 가기도 한다. 그가 얼마나 준비된 목사인지는 상당 부분 간과된다. 세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자기편을 세우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런 경우만이 아니다. 목회자들의 세상은 어느 신학대학을 나왔는가에 의해 갈린다. 감리사 선거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거 뿐 아니라 교회의 담임자를 결정할 때도 어느 대학 출신인가, 어느 라인인가에 따라 우선적으로 결정된다. 그 같은 세상에 성경과 주님은 액세서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해 여름 중고등부 수련회 인도를 부탁받았다. 약 300명 정도가 모일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150명 정도만 모여 있었다. 이상해서 교육부 총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기막힌 얘기를 했다. 연합 수련회 계획은 지방회 때 결정된 사항인데, 연회 때 그동안 하던 순서를 무시하고 투표로 감리사를 선출한 결과 그것의 부작용으로 떨어진 측 대학 출신 목회자들이 수련회를 보이콧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갈등에 아이들까지 끼어들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는 목회자들이라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미 교회는 병들었고 심지어 목사들은 그 병을 일으키는 요인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목사들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장로와 평신도 지도자들 역시 병든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사람만 보인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신경 쓴다. 하나님을 의식해 하나님 앞에 선 요셉 같은 이들이 없다. 과연 요셉이 했던 고백을 목사들이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는 과정에서 구제 문제를 놓고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나뉘어졌다. 그것으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엔가 사도들조차 그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는 처지에 놓였다. 바로 그때 사도들이 결정한 것은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인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기도와 말씀을 전무하겠다는 것은 군중 속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해결책은 ’고독‘이었다. 고독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목사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지 않는 것 같다. 성공지향적인 교회 부흥이 가장 큰 관심이고 성공과 감투 그리고 연봉과 부요에 정신이 팔린 이들만 보인다. 나중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삯군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2
전체보기
  • 현희 2018-09-01 21:21:51

    사랑의하나님계시지요!저희는믿습니다.하나님말씀이살아있지않고 말씀중심이아닌 인본주의의목회로 넘가슴이아립니다.주님뵙기를원합니다!주님께서살아역사하심을깨닫게되길기도합니다   삭제

    • 이종명 2018-08-29 07:31:45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선다' 이것만이 우리 모두가 평생을 붙잡고 살아가야할 '살길'입니다.
      그 길, 함께 가겠습니다.   삭제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