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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어른은 어디 있는가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1962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함석헌은 필라델피아 근교 펜들힐이라는 퀘이커 수련원에 머물면서 ‘누에의 철학’이라는 짧은 글을 쓴다. 그곳은 이후 ‘펜들힐의 명상’이라는 글의 배경이 될 정도로 함석헌에게는 의미 있는 곳이었다. 함석헌이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철학으로 사용해 표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퀘이커들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펜들힐에 묵으면서 한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철학적 고민과 또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성찰을 기록했다. 곧 자신의 사상을 누에와 비교하고 누에의 철학을 말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누에의 철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형상화 하고 한국의 신앙철학을 모색하고 더 나아가 누에를 통한 철학적 자기반성까지 하고있다.

함석헌에게 누에는 죽은 듯이 느리고 약한 비웃음의 존재였다. 누에는 비단의 영광을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권력과 도덕과 종교에 의해 희생된 씨알들의 상징이었다. 긴 잠을 자듯 ‘내일과 모래’를 먹으며 꿈지럭대는 누에는 결국 ‘죄의 몸’이란 허물을 벗고 끝내 나비로 솟아오른다. 함석헌은 자신의 모습을 변신을 위해 침묵하는 연약한 누에에 비유했고 자신의 철학을 이런 누에에서 찾았다. 누에가 자신의 살을 뱉어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죽고 또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함석헌은 말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비유한다. 누에가 지은 집은 ‘말씀의 집’이었고, 그 집을 깨치는 것은 또다시 ‘말씀’이었다. 죽어서 나비가 된 누에는 새 시대를 여는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다. 함석헌의 누에가 지은 말씀의 집은 존재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곳이 아니라, 존재를 변화시키기 위한 죽음에까지 이르는 언어적 성찰의 공간이었고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는 집이었다.

함석헌의 누에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철학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루는 철학이었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 약자의 죽음, 억압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철학이 아니라 신음하는 생명을 위한 고난과 생명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누에는 스스로 죽어야 살 수 있다. 누에가 몸을 뱉어내 집을 짓는 과정을 말을 뱉어내 말씀의 집을 짓는 것이라 했다. 함석헌은 누에가 죽음을 통해 나비로 변신한 것을 새로운 말씀을 짓기 위한 것이라 했다. 이게 자기 자신, 목사라는 말이다.

들뢰즈의 ‘노인’, 헤겔의 ‘부엉이’, 니체의 ‘망치’라는 존재의 은유적 사변보다 함석헌의 ‘누에’는 이 시대를 사는 목사들에게 가장 적합한 철학적 충고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속성을 빌려 힘 꾀나 쓴다는 혹은 그 마당을 기웃대는 무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몸으로 비단을 내며 미래의 나방이 되는 시간’을 기다리며 스스로 죽어가는 ‘누에’, 그것을 자신의 존재론적 철학으로 삼아 성찰의 성소로 삼았던 함석헌 선생. 이 감리회 바닥에 큰 어른은 어디 있는가! 존재를 걸고 의자나 밀치고 댕기는 잔챙이들 말고 비단 금실을 토해내는 혹은 토해 낼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목사다운 목사 말이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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