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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도 기도할 수 없다면 무자격 목사다하정완 목사, 꿈이있는교회

베드로의 생애 중 가장 참혹한 순간들은 하루 이틀 사이에 집중됐다. 그 중 하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있지 못한 순간이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탄식하셨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 14:37).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시간 기도는 작정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베드로는 육을 제어할만한 영적인 힘이 없는 존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기도하지 못하는 그에게 드디어 일이 터진다. 무기력하게 멀찍이 예수를 좇아가던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참혹했다. 닭이 울 때 예수가 베드로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 외에는 없었다. 운다는 것은 그의 처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우는 것은 힘이 아니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2011년 4월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선교봉사를 떠났던 어떤 여성 신자는 한 신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 그곳에서 그 피해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신부는 여성 신자가 혼자 있는 방의 문을 따고 들어와 성폭행을 했다. 물론 그가 성폭행한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식하면서 한 행위였다. ‘악을 행한 그 신부’는 악을 생각하며 행동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신부가 이상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달라.”(KBS 9시 뉴스, 2018년 2월 23일 보도) 아쉽게도 신부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베드로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한다. 그런데 이때 혹 깨달을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처럼 울음 밖에 없다. 슬퍼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베드로의 비참함은 예견된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눅 22:44) 떨어지도록 기도하는 예수를 보면서도 기도할 수 없었다. 기도할 수 없는 것이 그가 무너질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다. 시대의 위기, 교회와 목사의 위기는 기도의 부재에 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과 독대(獨對)하여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만으로 그는 그만큼 주목받는 사람이다. 그 같은 것이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당연히 하나님의 책망도 들린다. 우리가 짓는 죄와 더러움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죄를 무감각하게 후안무치한 상태로 유지할 수 없다. 옷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목사가 사라졌다. 기도하지 않는 목사, 심지어 기도하려 하지만 기도할 수 없는 목사만 많아졌다. 기도 없이 다른 것으로 목회하는 세속적인 목사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기도 없이 하는 모든 목회는 허무에 이를 것이고 정치와 인간적인 방법만 남을 것이다. 아프다. 주님이 탄식하신 ’한 시간 기도‘도 할 수 없다면 무자격 목사라 해도 틀리지 않으니까, 주님을 따르는 종이라 말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이것을 부끄러워하는 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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