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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이끌려 살아온 지난 100년”‘자랑스런 감리교인상’ 1호 김옥라 장로
각당복지재단 통해 사회봉사에 앞장서

감리교회 평신도단체장협의회(장로회, 여선교회, 남선교회, 청장년회, 청년회, 교회학교)와 3개 신학대학교(감신·목원·협성)는 ‘자랑스런 감리교인상’ 1호에 김옥라 장로를 선정했다. 지난달 18일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창립 121주년 자리에서 진행된 ‘자랑스런 감리교인상’ 수여시간에 백삼현 장로는 “이 상을 제정하며 1호에 김옥라 장로님을 선정하는데 어떠한 이견도 없었다”고 표현했다.
김 장로는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또한 감리교회를 위해 헌신했으며 각당복지재단을 통해 사회봉사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김옥라
김옥라 장로는 1918년 9월 강원도 간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조부모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여 선교사들과 자연스레 왕래가 있던 가정이었다. 온 가족이 교회를 나가는 것은 물론 막내 숙부가 목사였다. 동네에서는 김 장로의 집을 ‘예수 믿는 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다보니 어린 김옥라에게 복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교회는 그의 놀이터였고, 생활의 전부였다.
“어린시절 교회는 제 삶의 전부였어요. 당시 유년주일학교에서 노래, 시 낭독 등의 문예의 밤 행사를 했었는데 전 번번이 독창도 하고 이야기연사도 했지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신나는 날들이었습니다.”

걸스카우트 운동에 전념한 김옥라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정은 통역과 번역을 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했다. 김옥라는 일본에서 영문과를 졸업했기에 군정청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된다. 그는 군정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영문 타이핑 클래스를 지도해 100여 명의 타이피스트를 배출했으며 이화여대 학생들에게는 통역을 가르쳤다. 또한 외자청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정부의 해외자금 유치업무도 취급했다. 이때 김옥라 장로는 걸스카우트(소녀단) 운동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부산으로 피난갔다. 그렇게 부산 송도에서 살면서 공무원으로 계속 일하던 김옥라 장로는 일을 그만두고 군정청에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걸스카우트 운동에 전념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 주부들에게 걸스카우트 운동을 설명하고, 창덕여고 피난학교 학생들로 ‘창덕 소녀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초등학교 여학생들을 모아 ‘소녀대’를 조직했다.
김 장로는 1952년 11월 전국 걸스카우트 간사장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34세였던 때였다.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돌아온 김 장로는 서울 소녀단 재건에도 앞장섰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국의 걸스카우트 운동이 살아있음을 알리는데 공헌했다. 그렇게 간사장으로 15년간 재직하면서 전국의 여학생들에게 애국심, 자부심, 독립심을 심어주는 일을 했다. 무엇보다 김옥라 장로는 한국의 걸스카우트를 국제기구의 회원으로 가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걸스카우트 회관 마련에도 큰 역할을 했다.

박사학위 포기하고 선택한 ‘세계 감리교여성 연합회’ 회장

남편 라익진 박사와 함께

김옥라 장로는 1967년 새로 구성된 한국교회 여성연합회 초대부회장을 시작으로 2대 회장과 1974년 전국연합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76년 세계감리교 여성대회에서 동남아시아지역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1년 그는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World Federation of Methodist Women) 회장에 공천된다. 뜻하지 않은 제의기도 했지만 당시 그는 박사학위를 준비중이었기에 이 제안을 받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내규상 회장직을 맡으려면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기에 김옥라 장로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 남편에게 전화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남편에게 울음 섞인 소리로 의향을 물었어요. 그랬더니 ‘박사학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세계회장 자리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라며 적극 지지해 주겠다’고 남편이 말하더라고요. 결국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결국 세계회장을 택했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택하심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죠.”
김 장로는 세계 회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60년사를 출판하고 무엇보다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를 UN의 NGO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그는 임기 5년 동안 50개국 100여 개 도시를 방문했다. 당시 세계감리교총무가 그에게 “존 웨슬리보다 더 많이 다녔다”고 할 정도로 그는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세계 여성들을 하나로 묶는데 큰 공헌을 했다.

국가를 위해 자원봉사의 일을 시작한 김옥라
1986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차기 회장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김옥라 장로는 무엇을 하며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이대로 은퇴를 하기에는 제가 건강했어요.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었습니다. 그동안은 세계를 위해 일했으니 이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김 장로는 남편과 상의 후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능력회’를 조직했다. 일반 시민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일은 ‘자원봉사’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자원봉사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능력회’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 또한 노인, 장애인, 어린이 등 도울 수 있는 이들을 찾아 봉사를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그의 호를 따서 재단 이름을 ‘각당복지재단’으로 변경했다.
김 장로는 또 남편이 사망한 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지를 고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죽음준비교육과 슬픔 치유의 일 등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 재임 당시 각 구에 자원봉사 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자원봉사자 양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결국 김옥라 장로는 정부에서 하지 않는 영역을 찾았다. 바로 비행청소년과 호스피스였다.
그렇게 각당복지재단 산하에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 △무지개호스피스연구회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두고 교육과 봉사를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1만명 이상이 교육을 받았고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은퇴 후에도 식지 않는 열정
김옥라 장로는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또한 2015년 봄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에 추대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선에서 물러났기에 남은 여생을 쉬면서 보낼 법도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삶은 계속되고 있다. 매주 월요일에는 각당복지재단 직원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또한 매일 아침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보내고 기도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기도를 합니다. 자녀와 손자손녀 등 20여 명의 가족들에게 매일 성경말씀을 보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복지재단 아침기도회에도 꼭 참석하고 있습니다.”
김 장로는 집필활동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수필집을 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걸스카우트에 대해, 또 여선교회 일을 하면서 책을 냈습니다. 또한 각당복지재단에 있으면서 10년사, 20년사를 출판하기도 했고요. 그동안은 정사를 다루었던 책을 출판했다면 이제는 숨어있는 에피소드를 묶어 수필집을 내고 싶습니다.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김옥라 장로는 지난날의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이끌려 온 삶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9월 27일은 제 나이가 100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가정을 허락하시어 남편 故 라익직 박사와의 사이에 제민, 제훈, 제관, 제건 4형제를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손에 이끌려 한 세기 동안 봉사의 삶을 살았으니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들 부부와 함께

 

김준섭 기자  joons@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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