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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태극기중등부문 최우수상 - 김동민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감리회와 국민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신석구 목사 전기 ‘출이독립’(이덕주 교수 저, 신앙과지성사)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위원장 이병우 감독)가 주관으로 진행됐다. 독후감 공모전에서 중등부 최우수상을 차지한 김동민 학생(천안하늘샘교회, 사진)은 신석구 목사의 신앙과 애족의 삶을 따라가며, 현실의 교회와 교인,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의 비교를 통해 바른신앙을 찾아갈 것을 다짐하는 동시에 촉구하는 글을 써냈다. 기독교타임즈는 ‘출이독립’ 독후감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6주에 걸처 게재한다. <편집자주>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차가운 계절, 한 노인이 있었다. 때로는 고통스럽던, 때로는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던 세월을 깊게 생각하듯 창밖 가까이 내려앉는 눈송이들을 노인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깨부수듯 한 간수가 소리쳤다. “이보쇼 목사 양반, 면회요!”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겠소, 곧 가겠소.” 노인은 가족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 양손에 먹을 것과 수의를 들고 면회장을 나섰다. 그리고 곧장 다른 수감자들에게 향했다. 그는 헐벗은 자에게는 자신의 수의를, 배를 곯는 자들에게는 사과와 달걀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주머니에서 쌀가루를 꺼낸 뒤 물에 타서 연신 들이켰다. 자신들을 사랑하는 양처럼 아끼는 노인에게 한 수감자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노인은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사 신석구요.”

신석구 목사님을 만나다
신석구 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유초등부 때었다. 우리 교회는 115년의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교회였고, 또 신석구 목사님께서 천안 목회 시절 담임하신 교회이기 때문에 주일학교 역사 교육 시간에 자주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떻게 순교하셨는지와 같이 세세하고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3·1 운동 99주년인 올해, 우리 감리교회에서 ‘다시 세상의 빛으로’ 라는 주제로 기도회를 할 때 3·1운동을 주도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많은 감리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벅차고 자랑스럽게 다가왔다. 신석구 목사님도 그분들 중 한 분이셨다. 얼마 후 나는 신석구 목사님의 전기 ‘출이독립’이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을 구매해서 읽어 보았다. 책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 그리고 그것에 순종한 한 사람, 은재 신석구 목사의 길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유교에 빠져 있다가 세 번의 타락을 겪었다. 이후 친구의 전도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개성으로 가서 권사가 되었다. 1912년 채무 때문에 낙방하던 전도사 시험을 통과, 1917년 목사안수를 받고 1919년 민족 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2년간 옥고를 겪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수입으로 가난한 목회생활을 하며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다가 1938년 천안에서 일제의 압력으로 교단 차원에서 추진하던 신사참배를 반대하자, 투옥되어 옥고를 겪었다. 천안지방 다음으로 파송된 진남포 신유리구역에서는 정춘수의 혁신교단에 반대하였고,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또 다시 옥고를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반공활동을 전개하다 진남포 4·19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50년 평양 인근에서 순교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가운데에서 지내고, 고령의 나이에 옥고만 4번, 천안지방 감리사로 지내던 중 시작해 죽을 때까지 계속한 생식 등 이렇게 힘들고 모진 삶을 살아가면서 그가 보여준 믿음의 자세는 복음과 민족을 지키고 세우는 삶이었다. 말 그대로 오른쪽 어깨에는 십자가를 지고 왼손에는 굳게 태극기를 쥐고 나아갔던 것이다.
그의 사후 약 70여년이 지난 지금, 많은 순교의 씨앗이 심겨진 이 땅에서 감리교의 교세는 크게 늘었다. 2018년 감리교회의 교세는 약 133만 명에 달한다. 총력을 다해 전도하고 모범을 보인 결과였다, 그렇다면 지금도 더 많은 열매를 맺어 나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교세로만 따지자면 오히려 크게 감소 중이다. 교세뿐만이 아니다. 감리교를 포함한 기독교 전체에 대한 명성이 매우 실추되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옛날 열악하고 부족한 상황에서 선교와 목회를 하고, 얼마 되지 않는 성도에 얼마 되지 않는 수입, 게다가 체제의 감시 하에서 억압받고 탄압받던 시절의 교회는 어떻게 부흥을 이루고 나라를 살릴 수 있었을까?

바른 신앙만이 나라를 구한다
전도와 민족운동은 어쩌면 깊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님은 복음 전파를 구국운동으로 생각했다.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순히 교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교회를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이 성장할수록, 그는 단순히 복음을 나라를 위한 도구로 여긴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나라도 지킬 수 있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전파를 제시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어려서부터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였다. 당시 기독교는 캄캄하고 암울한 조선 땅의 빛이요 희망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본국에서의 편안한 목회와 삶을 포기하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나라인 조선에 와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벌이고, 진리를 전했다. 그러다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반면 수백 년간 이 땅의 통치 이념이자 진리로 군림해오던 유교는 비단 ‘젊은 날의 신석구’ 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타락과, 통치 제도의 문란함을 막지 못했다. 단지 윤리적이고 이상적인 종교에 머무른 결과였다.

“어찌하여 유교에서 사람 되게
못하는 것을 예수교에서 하는가?” 

그는 세례를 받고 권사가 되고 전도사, 목사가 되었다. 목회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무엇보다도 가난과 싸워야 했고 때로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에 시달렸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늙은 목사를 일제는 가만두지 않았고, 오랜 친구는 변절하여 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붙잡은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민족을 살리라는 사명이었다. 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의지했기에 자신은 더 가난해지고 비참해지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어린 양들을 잘 이끄는 목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바른 국민만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안 부임 시절 나환자들과 거지들을 먹여 살리고, 가난하여 심방 요청도 하지 못한 성도를 보고 생식을 시작하였던 것을 보면 “목회자의 희생적 봉사는 민족 구원으로 이어진다” 라는 신념을 자신부터 몸소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북한에서는 성화신학교 부흥회에서 교회를 민족운동의 도구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교회는 신앙을 위해 존재하고, 바른 신앙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라고 설교하며 그의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 구국론을 가르쳤다.
지금의 우리에게 나라는 있지만, 바른 신앙은 있는가? 바른 신앙을 회복하고 복음으로 잃어버린 양들을 하나하나 찾아갈 때, 우리의 아름다운 나라는 굳게 설 것이다. 그 중심에 민족의 빛이고 희망이었던 감리교회가 다시 한 번 서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다투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다. 하지만 어느 공동체든 불완전한 사람이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미움과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어느 정도의 교세를 가지던 초기의 한국 기독교도 많은 분쟁을 겪었다. 신석구 목사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에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지 않았다. 그가 미워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캐나다 출신의 로버트 하디 선교사였다. 신석구 목사님이 그를 미워하게 된 계기는 그의 친일 발언이었다. 하디가 한일합방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하자, 그 발언을 들은 신석구 목사는 그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 5:23) 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는 하디와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가 배운 것은 교회나 성도간의 불화와 분쟁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하여 선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천안 부임 시절 만난 베어 선교사의 문제도, 혁신교단의 용서하기 힘든 행보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권면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노력했다. 특히 이 ‘혁신교단’에 대해서 이전에 들어본 바는 있었지만 잘 모르던 나였기에 그들의 행보를 읽을 때는 매우 충격적이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였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믿었던’ 목사 정춘수의 변절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민족과 교회를 위해 동업하던 친구가 갑자기 수감되었다가, 사상전향을 하고 적극적 친일파가 되어 교회와 민족 모두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니 신석구 목사님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하나님은 또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 생각을 해 보니 나 또한 마음 한 켠이 참담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님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변절자들에 분노하여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이지도, 그들을 만나 호통을 치고 고함을 지르지도, 뜻이 맞는 목회자들과 교회를 모아 새 교단을 만들고 분리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도와 그들을 향한 권면만을 이어갔다. 그는 알았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그저 돌아서버린 오랜 친구를 위해 소고기 두 근을 사, 진심어린 충고를 전하는 촌뜨기 목사였다. 그가 비록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지만, 그의 진심어린 권면은 교회의 분열을 막았다.
오늘날 수많은 교단들이 나뉘어 한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우리 감리교회가 많은 분쟁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다툼과 분쟁이 있을 수 있지만 신석구 목사님처럼 서로 권면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아름다운 교회를 이어나가는 감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
수표교교회에서 안정적 목회를 하던 신석구 목사는 ‘1919년’을 맞았다. 1919년 초반, 고종의 승하와 무단통치로 인한 항일 정서, 민족자결주의가 한데 합쳐 국민적 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감리교회가 있었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천도교가 합작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자, 오화영 목사는 당시 감리회의 지도자급 인사였던 신석구 목사에게 독립운동을 제안한다. 신석구 목사는 즉답을 내놓지 않고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을 하는 것과,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기도하던 중 2월 27일 새벽에 그는 한 음성을 들었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검사가 말했다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신석구 목사가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자신이 처음부터 주도한 일도 아니었고, 가장 마지막에 참여했기에 검사의 비위를 맞춰주고 무죄판결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온전히’ 순종했다. 결국 그는 3년의 징역형을 구형받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후 그는 파송되는 곳으로 순종하며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그가 천안지방 감리사로 부임하던 1936년 감리교는 신사참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과오를 범했다. 1938년에는 천안경찰서장이 그에게 직접 찾아와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신석구 목사는 당연히 거절했고, 그 대가는 구류였다. 2개월간의 구류기간 동안 그는 등에 난 악성 종기로 고생하다 풀려난다. 이후 그는 진남포지방 신유리구역으로 파송되지만, 그의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운동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용강경찰서에 구금된 상태로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북쪽에는 공산당이 들어왔다. 그는 공산당의 손에 순교할 때까지 교회를 지키고 공산당의 정책에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악에 대한 비타협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우리가 악의 침투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사참배는 관습으로,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로 포장되어 많은 기독교인들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다. 감리교회는 이런 상황에 지도부가 적극적이고 단호한 대응을 취하지 못해 결국 어떤 교단보다 빠르게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신석구 목사님과 같이 깨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과 타협하지 않았다.
신석구 목사, 그 파란만장한 삶의 일대기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로 가득 차 있다. 출생에서부터 세례, 목사안수, 3·1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순교까지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예비하시고 격랑의 세월 속에 신석구 목사님을 사용하셨다.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 어떤 길보다도 좁았다.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은 바로 이렇게 좁은 길은 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피가 땅에 심기는 과정이었다. 3·1 운동의 씨앗이 심기자,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8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자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영광스러운 승리였다. 3·1 운동을 주도한 감리교인의 후예로서 이 자랑스러운 마음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 감리교회는 또 하나의 씨앗을 심으러 나가야 한다. 신석구 목사의 결의에 가득 찬 이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기독교타임즈  gam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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