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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첫발을 내딛었다 생각하자1017호 사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란 속담이 있다. 답답한 사정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정을 말 못하는 이의 안타까운 심정에 비유적으로 대입한 말이다.

어쩌면 지난 수개월 감리교회 구성원 상당수의 심정이 이 속담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서울남연회 감독선거 결과를 놓고 격렬한 논란과 공방이 벌어졌음에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대다수는 그저 불의에 눈감는 비겁한 이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무 잘라내듯 이번 일을 판단하여 행동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판단 자체가 다르다거나 합법적 절차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풀어가는 시각과 방식에 대해서도 우리 안에 상당한 이견이 존재한다. 피해자들의 호소도 외면할 수 없지만 억울하다는 당사자의 변명도 일방적으로 묵살하면 안 된다는 이들도 있다.     

10여 년이 지난 일을 다시 들춰내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정죄하기 이전에 우리의 무기력함과 무책임 했던 과거의 민낯을 먼저 부끄러워하고 반성한 이들도 상당수라 믿는다. 

이번 일을 돌아보며 가장 아쉬운 것은 당사자의 무리한 선택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의미를 조금 더 새겨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 이유여하를 떠나 이제 몇몇의 결단으로 감리교회를 소란스럽게 한 이번 소동은 정리국면으로 접어든 모양새다. 물론 아직도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고, 일각에서는 이런 식의 해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발하는 이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원칙과 명분만을 따진다면 충분히 일리 있고 정당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있다면 그들도 불만과 반발이 가능한 문제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다는 극한대립이 이어지면 그 결과로 나타날 일에 대해서 신중한 검토와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이번 사태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 과거에 대한 철저한 단죄나 특정인 죽이기가 목적의 전부인지, 아니면 이번 일을 거울삼아 바르고 건강한 감리교회를 만들어내야 하는지를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은 나무보다는 숲을 바라봐야 할 때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는 감독회장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법적 문제와 금권 선거 시비로 온통 달궈져 있었다.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들춰내고 정죄하는 일에 서로가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무리되지 못한 그 소동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겼고 내부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을 뿐, 그런 시비의 원인이 된 법이나 제도,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또 3년 전쯤 언론을 통해 목회자 성범죄가 문제시 된 일이 있었다. 감리교회는 감독회장이 앞장서 대책회의를 열고 “교역자 성 일탈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일갈한 일이 있다. 그로부터 2년,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자.  

소아병小兒病적 시비 보다는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빈대는 잡아야 하지만 그 이유로 초가삼간 다 태우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첫발을 내딛었다 생각하자. 완벽한 승리에 매달려 부정적인 막말을 쏟아내고 대립각을 세워 결국은 ‘또 다른 우리 자신’을 압박할 것이 아니라 지혜를 모아 모두가 승리하는 감리회의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만들어 갔으면 한다.  

과거를 정리하는 싸움에 맴돌지 말고 이제 미래를 만들어 가는 투쟁으로 방향을 바꾸자는 말이다. 누군가를 정죄하는 일에 그치지 말고 이번 일을 발판 삼아 목회자의 성 범죄에 대해서만은 더욱 철저하고 엄격한 관리를 제도화 하는 감리교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얼마전 JTBC 방송은 “2005년부터 작년까지 아동 청소년 성범죄로 처벌을 받은 목사를 조사해봤더니 모두 79명에 달했다”고 지적하면서 “이 가운데 21명은 여전히 ‘성직자’를 자임하면서 목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끄럽지만 이 수치 안에 감리회 목회자도 8명이나 포함돼 있다. “교단의 방치와 묵인 속에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은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는 언론의 비판을 준엄한 꾸지람으로 들어야 할 때다. 

예수님은 음란한 마음조차 죄라 했다. 교회 안의 성 범죄에 대해서는 사회법의 판결을 기준 삼을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엄격한 우리의 잣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죽하면 ‘여성 교인이 안전한 교회’가 구호로까지 등장하겠는가. 

냉소적 시비나 사소한 트집 잡기가 아니라 큰 틀의 개혁과 갱신에 한걸음 다가가는 오늘이 됐으면 한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처럼 ‘디테일의 악마’를 넘어서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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