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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100주년에 바라 본 3·1정신! ( I )
‘1919년 3월 1일’에서 본 3·1운동의 메시지
유은식 목사(미추홀작은도서관 관장, 예음교회)
목 차
I. 1919년 3월 1일에서 본 3·1운동의 메시지
II.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이전에 일어난 일들
   1. 정치적 상황
   2. 젊은 지식인들의 자강운동
   3. 민족대부흥운동
III. 자강운동에 앞장 선 인재들은 누구인가?
IV. 100년 전의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무오독립선언서.

해마다 3·1절이 되면 대통령, 국회의원, 3·1운동 기념사업회, 기타 각종 단체 등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그리고 반드시 나오는 말이 있다. “과거 3·1운동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니 이 우리도 3·1정신을 이어가자!”라고 말이다.

그러면 3·1정신이 무엇인가? 그들의 말에도 우리가 계승할 3·1정신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말이 없다. 이것이 불분명하다면 계승은 고사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에 놓인 자신들이라면 일제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그러지 못할 것임에도 이 시대 청소년들은 태극기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애국가 작곡자를 모르며 또 4절까지 부르지 못해 역사를 모른다고 비판을 한다.

도대체 3·1정신은 무엇인가?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그 자체가 3·1정신인가? 아니면 저들의 총칼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부르도록 이끈 정신이 따로 있었는가? 3·1운동에 대해 지난 100년간 들려진 이야기는 1919년 3월 1일 정오 이후의 이야기이다. 즉 3·1만세운동이 일어나 번져나간 과정과 일어난 피해에 대해서만 나열하며 3·1정신을 운운했다. 예를 들면 제암리교회는 3·1운동의 현장이 아니다. 무지한 일본 경찰들의 만행이 벌어진 피해현장이다. 해마다 이곳에서 3·1기념행사를 한다. 피해의 트라우마가 있을 뿐 3·1정신이 배어 있는 곳이 아니다. 또한 3·1절이 되면 반드시 나오는 인물이 있다. 병천의 유관순이다. 16세의 이화 여고생으로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옥고로 인해 18세의 어린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어린 나이로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말만하지 왜 어떻게 이런 애국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이 없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필자는 1919년 3월 1일 정오 이전의 상황을 살펴봄이 3·1정신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다.

1. 민족대표 33인은 누구인가?

먼저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한 민족대표 33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일본에 대한 저항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이라고 하니 정치인들 같고 독립투사들 같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감리교 목사 장로 9명, 장로교 목사 장로 7명, 천도교 도사 장로 15명, 불교 승려 2명이다. 모두가 종교인들이다.
적어도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국가관, 민족관이 어떤지 알아야 저들이 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왜 자기가 속한 종교에 진리탐구하며 종교지도자로 있지 아니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했을까? 이는 저들의 일탈행위인가? 아니면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나타난 행동인가? 이런 판단이 서야 진정한 3·1정신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33인에 대해 평가절하 하는 글과 말을 가끔 듣는다.

2. 기독교와 천도교의 관계는 어떠한가?

불교도 마찬가지이지만 만세운동에 참여한 천도교와 기독교! 잘 어울리지 않는 컨셉이다. 천도교는 본래 동학이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종교로서 서학(천주교-기독교)에 대립해 출발하였다. 동학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며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들의 주장은 ‘척양척왜斥洋斥倭!’다. 즉 ‘왜와 양이를 물리치자’이다.
동학은 최제우, 전봉준에 이어 1905년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명을 했다. 척양척왜를 하나의 강령으로 이어 온 천도교가 1919년에는 기독교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저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는가? 그것은 기독교의 의료선교의 힘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병원에서 치료와 돌봄을 받아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최제우의 귀에 들어가자 기독교를 재평가한 동학은 척양을 빼고 척왜만 외치게 되었다. 그러니 이 과정도 살펴야 3·1정신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청소년들의 학교 교과서에 보면 3·1만세운동에 대해 기독교에 대한 언급은 없고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이 주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손병희를 종교인 곧 천도교 교주라 하지 않고 선생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상황을 표현하지 않으니 과연 이 시대에 계승할 3·1정신을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3. 왜 1919년 3월 1일인가?

본래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에 추진하고자 했다. 고종의 장례일에 전국에서 백성들이 모인다고 보아 그렇게 계획을 했다.
그런데 막상 만세운동의 날이 가까워오자 3월 3일에 대해 부담이 갔다. 천도교의 4대 강령을 보면 2항에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는 규정이 있는데 국왕의 장례 곧 집안 아버지의 장례일에 소란을 피운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하루를 앞당겨 3월 2일에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 날은 마침 주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하루를 더 앞당겨 3월 1일로 확정을 지었다. 이 날은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날이다.
이렇게 보면 3·1만세운동이 3월 1일에 일어난 것만으로도 그 정신을 알 수 있다. 주일은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기독교 정신과 또 국왕에 대한 도리로써 나타난 충효사상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애국심이 바로 3·1운동의 기본정신이라고 보았다. 이런 단순한 설명만으로도 그저 3·1운동 정신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4. 태동과 확산의 배경은 무엇인가?

1) 3·1운동 태동의 배경
3·1운동배경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1)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1918.1.8), 2)고종의 죽음(1919.1.21), 3)2·8독립선언(1919.2.8)이다 .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1일에 가까운 것부터 보면
① 2·8독립선언인데 이것은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한국)인 남녀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을 선포한 사건이다. 이것이 국내 민족지도자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불과 20일 만에 말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3·1운동 준비가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2·8독립선언보다 앞선 1919년 2월1일에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에서 영향을 받았다 함이 더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② 이보다 앞서 1월 21일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가 있었다. 국왕의 죽음은 일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국모(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분노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국왕마저 일본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소문은 또 한번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 일만이 3·1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을까?
③ 그리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말하는데 이 민족자결주의는 약소국의 처지에서 보면 희망과 용기를 줄 수는 있었겠지만, 정작 민족자결주의 14개 조항은 유럽 강대국에 점령당했던 발칸반도와 동유럽 약소민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와는 무관한 셈이다. 더욱이 미국은 이미 일본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강제 점령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실제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1945년까지, 미국은 필리핀을 1934년까지 강제 점령하였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적어도 필리핀이 풀려난 1934년까지는 한반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또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전국적 확산의 배경
일본은 1만 6000개 이상의 경찰서를 설치하고 2만 2000명의 헌병과 20만 명 이상의 헌병보조원을 앞세운 총독정치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박탈하고 민족 지도자들과 애국지사들을 검거 투옥하였으나 3·1만세 운동 당시 1542회의 집회가 사전에 발각된 일은 없었다.
그동안 조선의 역사는 역모 발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3·1운동은 한건도 발고된 일이 없다. 그것은 우선 33인들의 종교인들의 활동 거처가 한양중심이 아니라 전국 지방에 분포되었고 또 신앙인들로 다져진 연락망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뜨거운 신앙의 결집과 신뢰로 이뤄낸 성과이기도 하다.
이렇게 살펴보면, 위에 열거한 사건들이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서 3·1 정신을 찾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 시대에 계승할 3·1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3·1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기폭제는 무엇일까? 그래서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이전의 상황을 보려 한다. <계속>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막기 위해 파고다공원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고종황제 장례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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