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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학교>‘기억’하여(Remember) ‘함께’하다(Re-Member)함승수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교정상화추진위원회 사무국장)

기독교학교정상화추진위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는 21일 영락교회에서 기억(Remember)하여 함께(Re-Member)하다를 주제로 전국기독교학교대회를 개최한다. 발제 내용중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기독교학교의 모습을 돌아보는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은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큰 획이며, 대대손손 그 정신을 계승하여야 할 민족과 나라 사랑의 원천이다.
3·1운동이 가능했던 여러 가지가 요인이 있지만 기독교인들의 헌신 특히, 당시 전국적으로 설립되어 있던 기독교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이 기독교학교에서 배운 신앙에 근거하여 분연히 일제에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우리들의 선배들이 어떻게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는지 그 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우리도 그 신앙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3·1운동을 이끌어 간 기독교인들의 숭고한 희생의 역사를 기억(Remember)하여 한국교회와 기독교학교, 그리고 이 글을 대하고 있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로 함께(Re-Member) 서게 되길 기대한다.

3·1운동에 중심이 된 기독교학교

1. 탑골공원에 우뚝 선 학생!
3월 1일 독립선언식의 소식을 들은 수 만명의 백성들이 탑골공원으로 모여 들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독립선언식의 장소가 태화관으로 급히 변경된 것을 알지 못하여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중, 한 학생이 팔각정 위에 우뚝 섰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들었다. ‘독립선언서’였다. 그리고 당당히 ‘독립선언서’를 힘차게 읽어 나갔다. 그는 바로 경신중학교 출신 정재용이었다.
정재용의 용기 있는 외침 후 여기저기서 ‘대한독립만세’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 만세시위를 이끌어간 기독교학교와 학생들
1) 서울지역
3·1운동의 중심에 기독교학교와 학생들이 있었다. 특히 학생들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 사이에 독립운동 추진에 관한 의견교환이 있은 이후 학생독립운동에 대한 계획과 실천이 은밀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의 확인된 인원 만 3000-6000명으로 추산된다. 기독교 학교인 경신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세브란스의학학교, 신학교 등 수 많은 기독 학생들은 수 만명의 군중들과 함께 곳곳에서 목청을 높여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 곳곳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학생들이 앞장서서 독립을 염원하는 행진이 시작되었다. 서울 지역은 아래의 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조직적으로 행진이 진행되었다.

경신학교는 민족대표들과 함께 학생들의 집결방안을 모색하는데 힘을 모았다. 학생들이 독립선언의 중심에 서게 된 것에 경신학교의 역할이 컸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한 김규식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선언서를 외친 정재용을 비롯한 경신학교 100여명의 전교생과 졸업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결국 조선총독부는 경신학교를 ‘혁명자 양성소’로 낙인찍어 1920년까지 학교에서 수업 및 신입생 입학을 불허하였다.

배재학당은 민족대표 이필주 목사를 통해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보다 일찍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박동완 전도사와 배재학당 교사 김진호 전도사의 지시를 받은 배재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각국 공.영사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 배재학당의 기숙사는 학생들의 3·1 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모의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이 모임에 배재학당의 교사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화학당의 여학생들도 3·1 만세시위 선두에 섰다. 신덕심, 유점선, 노예달 등 선배들의 선도 아래 학생들은 소복을 입고 대한문으로 행진하였다. 서명학, 유관순,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학생들이 구성한 ‘5인 결사대’는 기숙사 뒷담을 넘어 곧장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3월10일 이화학당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정신여학교의 학생들은 고종 황제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기숙사 70여명의 학생들은 검은 댕기에 상복을 입고 일본에 항거하였다. 이후 3월 5일 이애주 선생을 중심으로 30여명의 정신여학교 학생들은 대한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수 천명의 학생 및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 결과 이애주, 임충실, 박남인, 김경순 선생을 비롯한 60명의 학생들이 학생 만세사건으로 인해 포승되어 끌려갔다.

2) 이북지역 : 선천과 평양
선천에서의 3·1 만세 시위는 기독교학교 보성여학교가 중심에 있었다. 보성여학교의 학생 60명은 기독교학교인 신성학교의 남학생들과 함께 1천여 명의 만세시위 대열을 이루어 선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보성여학교의 학생들은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는 동시에 태극기를 만들어 선천군에 속한 각 면 각 동리에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3월 1일 일제히 선천읍에 모여들어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일 이후에도 보성여학교의 학생들은 선천지역 교인들과 함께 선천 남교회와 북교회에서 모여 만세 운동을 지속하였는데, 이에 일반 군중도 합세하여 선천지역의 대 규모 만세운동으로 확장되었다.

평북지역은 여성항일운동이 격렬히 진행되었다. 보성여학교의 차경신은 선천에서 신한청년단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오십여 명을 모집하여 독립 운동의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보성여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하여 군자 모금 운동을 벌였다.

평양은 남강 이승훈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펼쳐지게 한 중심 지역이었다. 숭실학교의 학생 김건, 노원찬, 박병곤, 윤원삼 등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태극기가 제작되어 평양시민에게 공급되었고, 대형태극기를 제작하여 게양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학교 인쇄부에서 3000장 이상 인쇄하여 평양 시민들에게 배포하였고, 숭실학교의 학생고적대는 3·1 만세 시위의 행렬의 앞에 서서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연주하며 평양의 3·1운동을 이끌어 갔다.

3) 한강 이남지역 : 공주, 군산, 전주, 광주 목포, 대구, 마산, 부산 지역
[공주지역] 3월 7일 공주영명학교 졸업생 박장례와 학생들이 중심되어 공주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영명학교의 학생들은 공주 청년회와 함께 약 1,000장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3·1 만세 시위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어 갔다.

[군산지역] 1919년 2월 28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 200장이 군산영명학교에 전달되었다. 그리고 영명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3,500장과 태극기를 준비하는 중 무장 경찰관 수십 명이 학교에 들이닥쳐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교사를 붙잡아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행되지 않은 교사들과 학생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호남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연대하여 당초 계획대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148를 외쳤다.

3월 5일 군산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들과 구암교회 성도들이 시작한 만세 운동은 한강이남 지역의 최초의 만세 시위였는데 이후 총 3만7000명이 28차례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전주지역] 1919년 3월 13일 정오. 전주의 기전여학교의 학생들은 안타깝게 돌아가신 고종 황제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두려움 없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주지역의 만세운동은 기전여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14인의 결사대’가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전주 장터에서 벌어진 이날 만세운동을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다.

[광주지역] 광주지역의 독립 만세운동은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수피아여고 박애순 교사는 “각지에서 독립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들도 이 운동을 벌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외치며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애국심을 독려했다. 숭일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역시 평소 애국심과 독립심을 고취하는 교육과 기독교 정신을 기초로 나라를 위해 기도해 왔기에 주저함 없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목포지역] 목포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도 의로운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당시 정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아각(Daniel.j. Cumming) 목사는 광주에서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사본, 결의문 등이 담긴 봉투를 은밀히 전달받았다. 이후 정명여학교 여학생들이 교내 기숙사와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태극기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대구지역] 대구지역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이갑성은 대구의 계성학교로 찾아와 독립선언서에 지역대표로 참여할 것과 만세시위를 일으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기독교학교인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은 기독청년회와 협력하여 3월 8일 서문 밖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 대부분이 참여하여 순식간에 학생 시위대가 300여명으로 늘었고, 장터에 나와 있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700명이 넘는 대규모 독립시위가 이루어 졌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대구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아담스 목사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곳을 이용하여, 이 건물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산지역] 3·1운동 직후, 기독교 인사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부산과 마산 지역에 비밀리에 배부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의거의 준비를 서둘게 되었다.

수업을 마친 학생 11명은 기숙사에서 밤을 세워 태극기 50개를 만들었고, 교사들과 더불어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 문을 뛰쳐나와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여학생들의 만세시위를 보면서 민중들이 합류하였고, 시위 군중은 수백 명에 이르게 되며 이 날 시위는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부산 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의 의거는 당시 부산·경남지역의 3·1운동의 첫 화살을 던지게 된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 후 경남 각지에서 만세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마산지역] 마산지역에서도 3월 1일, 창신학교 변상태와 김관재가 서울로 올라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마산으로 내려와 3월 21일 추산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이 과정에서 서울에서 외쳐진 독립선언서가 창신학교를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되고,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문창교회 성도들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4) 3·1 독립운동을 이끈 기독교와 기독교학교
1919년 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에 있어 기독교와 기독교학교가 결정적으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회와 학교에는 주보와 교육자료를 만들 수 있는 등사기(복사기)가 있었기 때문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전국 823개의 기독교학교들은 전국에서 발발한 3·1운동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학교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나누었고, 만세시위의 앞장에 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뜨거운 고귀한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약 20만명 내외로 전체 인구의 약 1.5%에 불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골리앗과 같은 일제의 폭거에 대항하였다. 상해의 신한청년단으로 시작하여, 파리강화회의, 2.8독립선언 및 3·1운동에 이르기 까지 기독교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학교의 긍지와 오늘날 우리의 사명

3·1 운동에 있어 기독교인과 교회뿐 아니라 무엇보다 기독교학교와 기독교학교 학생들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경신, 배재, 보성, 숭실, 이화, 정신 등 수 많은 기독교학교 학생들의 참여는 다른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또 지속적이었다.

1919년 9월 장로회 총회가 발표한 6개월간 장로교회의 피해상황은 체포된 기독교학교의 교사 및 기관의 지도자가 202명이며, 파괴된 학교만 8개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살된 자가 41명, 매맞아죽은 자가 6명, 체포된 신도가 3804명 그 중에서 목사장로가 134명이었다. 또한 1919년 11월에 열린 미감리회 연회 보고에 의하면 당시 감리교 목회자로 수감중인 연회원(목사)이 18명, 유급 전도사가 51명에 이르고 일반 신도는 102명에 이르렀다. 기독교 지도자들도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한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두고 유식한 사람들이 독립불능론獨立不能福 또는 독립시기상조론時機尙早論 등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우직하게도 자신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비록 연약하고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기독교교육을 통해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어린 학생들은 민중을 계몽하며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매우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늦은 밤 학교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고, 시위에 참가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부지런하게 나누어 주고 시위의 앞장에 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기독교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성인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3·1운동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신음하던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항일 5.4운동과 인도의 반영 자치운동을 비롯하여 필리핀과 이집트,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학교의 가르침의 당연한 결과였다. 기독교학교는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배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였다.

기독 교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독립운동의 한 복판에 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기독 학생들은 민족의 미래에 공동체적인 책임감을 갖고, 기독교 가르침을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였다. 교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어리고 연약한 학생들의 목숨을 건 헌신은 기독교학교에서 배운 성경의 말씀이 민족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 ‘실천’되어 민족 전체의 소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기독교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할까?

자신이 살아있는 가르침 그 자체가 되어 학생들의 본이 되어 존경을 넘어 그 삶을 동경하게 했던 수많은 기독교학교의 선생님들과 자신의 안녕과 성공을 넘어 공동체와 민족을 위해 공부하고 때가 되어 분연히 일어났던 기독 학생들의 숭고한 헌신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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