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3·1만세운동 100주년에 바라 본 3·1정신! ( III )>3·1정신을 창출해 간 인재들유은식 목사(미추홀작은도서관 관장, 예음교회 담임)
목 차
I. 1919년 3월 1일에서 본 3·1운동의 메시지
II.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이전에 일어난 일들
   1. 정치적 상황
   2. 젊은 지식인들의 자강운동
   3. 민족대부흥운동
III. 3·1정신을 창출해 간 인재들
IV. 100년 전의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보빙사: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1900년에 들어서 대한제국이 망해가던 때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만들고, 신문학 활동을 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학회를 만들어 각종 애국 자강운동을 펼친 젊은 지식인들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동안 조선의 전통교육의 장소는 서당이었고, 성균관의 유생들이나 유림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1866부터 일어난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사건,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7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며 혼란해진 사회분위기 속에 1900년대의 지식인들의 활동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통치한 당시의 국왕은 1863년 12세로 등극한 어린 고종이었다. 그가 즉위하기 이전의 조선은 60년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국내의 모든 정치적 기반이 무너진 상태였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세 열강의 침략으로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운양호 사건이후 조일수호조약으로 수신사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자 고종은 조선의 부국강병의 길을 찾았다. 그래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의 발전상을 보기 위해 두 차례의 수신사와 두 차례의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중국에는 영선사를 파견했다. 그 결과로 조선이 ‘부국강병’하는 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고종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에 보빙사절단을 보냈다.

이 보빙사절단이 미국에서 가우처 목사를 만난 것이다. 가우처를 만나고 귀국한 홍영식은 고종에게 “특별히 미국교육제도를 본받아 인재를 양성하면 좋겠다”고 보고했고 보빙사절단을 만난 가우처는 일본에 있는 맥클레이에게 조선을 방문하라고 연락했다. 그 결과로 조선에 온 맥클레이가 김옥균 등을 통해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겠다고 요청할 때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윤허한 것이다. 이후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 메리 스크랜턴 부인, 언더우드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제물포로 입국하여 서울, 평양, 인천, 원산, 개성, 공주 등지에서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해 갔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의 이념으로 분류하자면 1)기독교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2)문화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3)민족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등이다.

1. 기독교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아펜젤러가 남아들을 데리고 가르쳤다. 이를 지켜본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다. 이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라는 의미로 “조선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라!”라는 왕명이 담긴 이름이기도 하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욕위대자 당위인력 欲爲大者 當爲人役, 즉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고 가르쳤다. 외세에 눌리고 강대국들에게 휘둘리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강한 군대를 만들라 하지 않고 영어를 배워야 국제사회에서 실력자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부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남에게 부림을 받으라는 봉사, 희생정신을 가르쳤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을 세워 여아들에게 서방세계에 대등한 여인상을 구축하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조선인 보다 나은 조선인을 만들고자 했다.

장로교회 언더우드 부인은 정신여학교에서 “그들은 영어를 배우지 않고 다만 한문과 한글을 배우며 무엇보다도 성경과 기독교인의 생활을 배우고 있다며 우리의 목적은 그들을 기독교적 한국인을 만드는데 있고 미국여성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고 했다.

배화학당의 캠벨은 “한국여성으로 하여금 학력과 신앙적인 자격자를 배양할 사회와 학교를 지도할 만한 일꾼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했다.

이렇게 기독교정신의 사립학교들은 선교활동은 물론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할 인재양성과 애국애족의 인간상 양성에 기여하였다.

2. 문화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문화란 너무나도 광범위하지만 이것에 대해 간략히 말한다면 실력향상, 생활향상, 계몽활동 등이다. 고종은 개항 이후 강대국들의 발전상을 견학하기 위해 유학생으로, 견학을 위해서, 해외로 젊은이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서구문물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들어 오자 이 문물제도를 습득하기 위해 1866년 ‘육영공원’을 설치하였다. 

특명 전권공사로 1898년 미국과 유럽을 다녀 온 민영환이 189년 11월 5일 흥화학교를 설립했다. 외국어와 선진기술보급이 주 목적이었다. 1896년에 설립된 중교의숙은 민영기에 세워졌는데 그는 1905년 한규설과 함께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활동과 함께 외국어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목적을 두고 일어, 영어, 한문을 가르쳤다.

1901년 서광세, 이광종, 박창동, 민병두 등 4인에 의해 세워진 낙연의숙, 1902년에 양재빈이 설립한 우산학교는 한국 현실에 맞는 생활인을 양성하고 생활향상을 목표로 한 대표적인 학교이다. 1905년에 엄주익에 의해 설립된 양정의숙은 일본의 문물제도를 보고 귀국하여 한국사회에 교육의 보급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세운 학교가 양정의숙이다. 교육이념은 “몽이양정 양심정기”로 올바르게 가르쳐 깨우쳐 준다는 의미로 올바름이란 정의롭고 슬기있는 완정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라는 뜻이다. 1906년엔 민영휘가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국가를 구하는 것은 정치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일제를 이기는 방법은 육영사업에 있음을 알고 시작했으며 이 휘문의숙에서 조선어 연구회(학회)가 발족되었다.

이렇게 조선인들은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보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육영사업을 전개해 갔다. 문화주의 사립학교가 세워지면서 그 수가 더해져 해가 거듭할수록 증가하였고 점차 국권 상실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함께 혼합되어갔다.

문화주의 사립학교의 또 하나의 특색은 여성교육에 있었다. 여성지위향상과 문화인으로서의 교양과 지성을 갖추기 위해 처음에는 선교사들에 의해 이화·배화·정신 등의 학교가 여성교육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으나 점차 각종 민간단체 개인독지가, 여성운동가들에 의해 여성교육기관인 1897년에 정선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진명, 명신(숙명), 동덕 등의 여학교가 세워졌다.

배재학당

3. 민족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선각자들이나 일반 사회단체들은 교육을 통해 새 민주질서에 의한 국가의식과 민권사상을 고취하고 외세침략을 구축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있었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애국사상을 불어 넣어 주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민족주의에 입각한 사립학교가 전국 방방곡곡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한국 근대교육 기간 중 가장 교육열이 고조되었던 시기이다. 독립운동가나 민간단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학교를 통하여 민족의 장래를 구하려고 하였다. 이 당시 한국사회 실정에 대해 ‘대한매일신보 사설’에 보면 절대적으로 교육이 국가를 소생시킨다는 것이어서 학교를 설립하여 모든 사회의 병을 고치고 민족을 도탄에서 구해야 된다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구국운동은 대개 민간단체와 선각자들에게 의해 이뤄졌는데 서북학회, 기호학회, 교남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흥사단, 대동학회, 개성학회 등의 사회단체와 안창호, 이승훈, 이동휘, 유길준, 남궁억 등 애국지사들에 의해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어느 특정인이나 사회단체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국민 전체가 적극적으로 이에 호응하여 이뤄 놓은 것이라고 본다. 당시 사립학교 설립은 전국 각지에서 이뤄졌는데 평안남북도에만 2000여교나 되었고 그 중 부천군에만 100여개의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학교들은 국민교육을 목적으로 하든, 인재양성이든, 실력향상이든, 계몽운동을 목적하든 설립자들의 개개인의 성향에서 학교가 설립되고 운영되었지만 그 중심엔 비운에 빠진 조국 고통에 허덕이던 민족을 구하고 외세를 구축할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부국강병의 조선(대한제국)을 만들기 위해 인재양성사업을 윤허한 고종의 명령대로 실천하기 위해 1885년부터 시작된 사립학교운영은 기독교주의 입장에서 출발하지만 처음부터 복음전파가 아니라 육영사업과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선교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창기 기독교가 이뤄 놓은 것은 교회설립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세웠다.

학교를 포함한 모든 기관들은 종교교육에 국한하지 않고 조선인들로서 갖추어야 할 생활인으로서 완전한 인격을 가진 국가에 유용한 사회인으로 인재를 양성해 갔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저들 나름대로 자기의 지식을 가지고 대한제국이 멸망해 가는 1900년부터 1910년 사이 민족혼을 일깨우는 활동들을 했다.(1018호 연재 글  참조) 그런데 이렇게 젊은 지식인들이 애국자주자강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식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지식 위에 이뤄진 또 하나의 구심점은 1903년부터 1910년 사이에 일어난 민족대부흥운동이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영적, 정신적 원동력이 되어 1919년 3월1일의 3·1만세운동을 향해 줄달음을 쳐 갔다. <계속>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