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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3·1 운동 기념 설교> 복음과 3·1운동 누가복음 4:16-21김재준 박사(1901-1987, 한국신학대학 학장 역임)
‘3·1 운동 55주년 기념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는 김재준 박사.

(이 글은 1974년 창천교회에서 열린 ‘3·1 운동 55주년 기념예배’ 설교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영이 내게 임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고향인 나사렛에 가서 처음으로 회당에서 선포하신 메시지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그 말씀을 우선 생각해 볼 때, 한국 사람은 늘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합니다. 특히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는 정치·문화·교육 등 모든 것이 다 일본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사람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것뿐입니다. 정치적인 압박과 경제적인 착취, 우리 문화의 말살과 역사의 날조, 이런 것들은 우리 민족을 물질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극빈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일본사람은 우리에게 “너희는 못난 인간들이다. 민족적으로 열등하다”고 하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무엇을 주장하거나, 우리 한국 사람이 이래서 되겠느냐고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뭐 건방지게 죠센징이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며 언제나 “입을 닥치라”는 식으로 끝을 내었고, 당장에 욕설이 나왔습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라는 환경적인 상황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할 때, 그 인간적인 가난이라는 것은 가장 비참한 가난입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신 것은 빵만으로 배불리 먹이면 다 된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이기만 하면 통치자의 구실을 다 한 것이다”라는 그런 따위의 유물론적인 경제 제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열등감과 자학적인 심리를 씻어 버리고, 인간적인 위신과 존엄과 긍지를 회복시키는 것을 근본 문제로 삼은 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난에 눌려서 인간됨을 포기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의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에,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맨 처음에 부딪친 문제를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은 권력을 가지면 맹수와 같은 그런 맹수형이 되어버리고 또 재산을 가지면 꿀돼지 같은 탐욕자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무서운 인간빈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조금 더 나아가면 인간 파산을 가져 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것을 충분히 자각해야 될 시점에 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타락자 혹은 상실자들에게 인간 회복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3·1독립 선언서를 읽어 보면, 우리 민족의 독립은 일본사람을 인간답게 하는 길도 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만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인간이 된다는 것을 시사해 놓은 것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포로된 자의 해방과 눌린 자의 놓임과 눈먼 자들의 보임을 선포하고 그 결론으로서 주의 복된 은혜의 해를 가져오며, 전파한다는 것 입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해서 일일이 구구하게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인간성 자체의 심정 속에서 못견디게 몸부림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스스로 경험하고 벌써 여러분 자신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 먼 자를 보게 한다는 문구는 우리가 다시 생각해 필요가 있는데,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보게 한 예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단지 “눈먼 자를 보게 한다”는 그런 해석만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눈이 멀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손을 얹어서 보게 해 주시면 전에 보지 못했던 사물을 보고,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친척을 보고, 사랑하는 자녀를 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이 말씀은 요즘 말로 하면 ‘의식화’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제대로 죄인이라고 의식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피압박자요, 노예화한 자요, 인간 상실자라는 그대로의 것을 의식하지 못해서 싱겁게 부풀어서는 스스로 잘난체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이 나라 백성들은 다 굴러 떨어져서 자기 행실을 다 못할 것이다”라고 보통 생각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오히려 자기가 유일한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인간, 특히 권력에 도취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맹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 역사를 들춰보면, 대개가 그런 유혹에 빠진 것을 보게 됩니다. 권력자들 일수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는 자기의 전체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수천만의 인간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데, 우리는 제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특히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똑똑하게 우리 눈앞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결론적인 구절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의 복된 해를 선포한다”는 이것은 “지금까지의 낡은 세기를 보내고 온전히 새로운 하나님의 메시야적인 세기를 도입한다”는 선언인데, 내 생각으로는 우리 3·1정신의 가장 핵심적이고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보라, 신천지가 내 앞에 전개되었다. 무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 그렇기 때문에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강력주의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들은 각성하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아까 독립선언서를 읽으셨는데, 나는 그 독립선언서를 요즘의 현대어로 번역을 해서 써서 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독립선언서도 조금 개역하고 고쳐 읽으면 여러분께서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강력주의는 오래 묵은 악마의 이빨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변질이 되기 전에는 인간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화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여기서 소위 새 세대가 도입된다 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한·일 관계의 실상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전에는 군사 침략이 앞서서 청·일 전쟁, 노·일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다음에는 정치적으로, 또 그 다음에 가서는 경제적인 침략이 따라왔고, 그래서 과거의 한국도 침략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 순서를 바꾼 것 같습니다. 경제 침략이 앞서고, 그 다음에 정치 침략이 오고, 그 다음에 군사적인 위협이 오는데, 다시 말하면 경제 대국이 앞서고, 정치 대국이 되고 그 다음에 군사 대국의 순서를 밟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싫어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이 되어있다는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일 국교 정상화 때에, 우리는 정상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주장을 했지만 그런 점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 볼 때, 그때 우리가 우려하던 그대로가 우리의 현상 가운데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만, 이것은 구시대의 유물로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구질서라며, 또 새 세대의 질서가 온다고 하는 것은 강력주의가 아닌 도의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 세계의 역사는 강력주의 정치에 의존하고 있는데, 세계사에 있어서는 지금도 소위 권력정치(Power Politics)에 의해서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으며, 따라서 지금도 구시대의 유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세계의 역사입니다. 국내적으로도 “정치는 힘이다. 강력적인 무엇이 없이 정치를 생각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정치의 초보라고 합니다. 국제적으로도 힘의 균형만이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고 있으며, 힘의 균형이 깨질 때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전쟁의 위험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전 세계 국가들은 집단적으로 자기네 강대국들이 마구 침략하지 못하도록 안전 보장을 해야 되겠다고 해서 국제 연합이 생겼습니다만, 실제로 강대국들의 자세에 따라서 국제연합은 강하게도 되고 약하게도 되므로, 강대국들이 협조하지 않는 한 유엔(U.N.)은 절대 무력하게 됩니다.

예수의 윤리에 있어서는 강력정치·권력정치(Power Politics)가 아니라 사랑의 정치가 주장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모습은 잃은 양 하나를 찾아다니는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모습인 동시에 참다운 지도자, 통치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 임금들이 하는 것과 같이 강력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그런 질서를 갖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사자가 되어야 큰 인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3·1운동의 정신 중에서 새 세기의 탄생을 선언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강력주의의 낡아빠진 맹수형이 아니라 도의와 사랑의 인도적인 세기라고 하는 새 세기를 우리가 그때에 도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인류의 평등·국가의 독립·국제 공존을 선포하고서 거기에서만 세계평화를 찾을 수가 있다고 했으며, 이것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고 새 시대의 요청이고 민족 발전의 자유로운 과정으로서 세계 문화의 창조적인 공헌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양심이 나와 함께 있고 진리가 나와 함께 행한다”는 이 정신과 이 운동을 좌절시킬 아무 권력도 있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는 일종의 종교적인 확신을 선언한 것입니다. 천도교에서 열다섯 분, 기독교에서 열여섯 분, 불교에서 두 분으로 모두 합쳐서 33인이 민족대표로서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의 각 지방에서 이것이 실천되어 나아가게 된 것은 역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그 거점이 되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던 중에도 교회당에 일본 군경들이 와서 불을 지르고 거기서 기어 나오는 교인들을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창끝으로 모조리 학살을 했다고 하는 제암리교회의 참상을 지금도 우리가 생각합니다만, 그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일본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은 역시 교회가 여기에 있어서의 가장 강력하고도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아니오”하는 한 마디로 외친 것뿐인 것으로,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고난을 감수했던 것이 그 때의 무저항적인 저항이었고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5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우리의 중론에 대한 것을 응답해 주셨습니다. 양심으로 심은 의의 씨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싹이 트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도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강력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만 이 낡고 악랄한 세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심판이 선포되기 전에 회개해야 할 그런 위기가 오늘의 시점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저는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해서 이 3·1절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엄숙하고 우리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운동이었던가 하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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