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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가족은 왜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나유관순 가家의 사람들 이덕주·최태육 지음 / 신앙과지성사

최근 한 교복업체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청소년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투사’로 유관순 열사가 꼽혔다. 무려 60.5%의 학생이 유관순을 선택했는데, 2위 안중근 선생이 15%를 차지했으니 유관순이라는 이름의 힘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화학당에 다녔던 유관순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참여했으며, 고향에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왜 항일의 삶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유관순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삼일운동에 중심에 서게 됐는지, 그리고 부모와 숙부, 오빠 등 유관순 일가는 왜 독립운동의 맥을 놓지 않고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걸어나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책으로 엮였다. 신앙과지성사가 내놓은 「유관순 가家의 사람들」은 한국기독교사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덕주 교수와 최태육 교수가 펜을 잡았다.

저자는 유관순가의 사람들 책을 통해 단순히 사람의 이야기만을 담지 않았다. 두 교수는 먼저 유관순 일가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왜 항일운동에 가담하게 됐는지, 기독교신앙을 갖게 된 원인을 우리나라가 걸어온 역사에서 찾는다.

책은 유관순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그들의 신앙이 시작된 지령리교회를 먼저 언급한다.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 지령마을에 위치한 지령리교회(용두리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불탄 사라진 아내교회(아우내교회)와 불과 1.5km와 떨어진 거리에 위치했다. 아내교회의 불탄 석가래를 옮겨다가 건축에 쓴 지령리교회가 아내교회를 잇는 교회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백여 가구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살해한 일본군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 세운 교회에서 유관순 일가는 포기가 아니라 항일과 독립, 나라사랑의 신앙정신을 배운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일제의 치량과 일진회의 수탈, 이와 대비되는 정부와 지역관청의 무능력으로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찾게 됐다고 설명한다. 의지할 곳 없는 세민 대중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복음을 받아들이고 때마침 일어난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를 통한 갱신과 변화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책의 2부는 유관순 가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조명한다.


유관순 일가에서 복음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육촌 할아버지인 유빈기(유성배)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1961년 한 인터뷰에서 “케이블 선교사와 친교를 맺은 유성배가 지령리의 한 초가를 얻어 십자가를 붙인 다음 선교를 했다”고 증언했다.

지령리 최초의 신자인 유빈기가 사촌형이자 유관순의 할아버지인 유윤기를 전도했고 작은 아버지 유중무도 교회를 나가면서 유우선 유관순 유중무와 아내, 유경석 유예도 등 후손들 역시 신앙인이 되었다고 책은 당시의 대한매일신보, 조선그리스도인회보 등 신문자료와 조선총독부 관보, 선교사 보고, 회의록 등을 들춰가며 고증한다.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하면서 또한 일가의 신앙의 맥을 짚어간다.

책은 마지막으로 유관순에 대해 소개하는데 이화학당의 친구, 오빠 유우석, 사촌 유예도, 노마리아, 헌병보조원, 판결문 등을 통해 사실 그대로의 유관순을 말한다. 단순히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에 참가한 대표적 인물이 아니라 형무소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까지도 1920년 3월 1일 제소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을만큼 유관순은 주도적이고 체계적이며 한결같은 독립의 정신을 보여준다. 

저자인 이덕주 최태육 교수는 책을 끝맺으며 “유관순 가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민족의식이 강한 민족의 영웅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 땅의 수많은 세민이 겪었던 아픔과 똑같은 아픔을 겪었고 이 아픔이 독립운동으로 발현된 것”이라 했다.

구지 차이점을 찾자면 순수한 저항 정신을 가졌으면 일찍 복음을 받아들여 부흥사경회를 통해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종과 머슴을 풀어주며 봉건제 계급을 철폐하고, 자기 갱신에 기초한 복음화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꿈꾸었다고 덧붙인다. 

이런 이들의 삶을 통해 저자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와 개혁의 삶으로 인도했던 유관순 가의 신앙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돌아봐야 할 삶의 자세”라고 역설하고 있다.

 

<유관순 가(家) 사람들의 독립운동>

유윤기(1845-1919)
유관순의 할아버지, 지령리교회 처음 교인으로 장남 유중권 내외가 일본군에게 학살된 것과 차남 유중무, 손자 유우석과 손녀 유관순이 투옥되는 아픔을 겪고, 두 달 보름 후에 별세하였다.

유빈기(1883-1927)
유관순의 6촌 할아버지(재종조)이자 유윤기의 사촌 동생. 지령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공주읍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됐다.

유중권(1863-1919)
유관순의 아버지. 아내 이소제와 함께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머리와 옆구리에 중상을 입고 지령리 집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별세하였다.

이소제(1875-1919)
유관순의 어머니, 4월 1일 당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중 일본군 헌병에게 학살되었다.

유우석(1899-1968)
유관순의 오빠. 4월 1일 공주읍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의 총검에 자상을 당한 채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이후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유관순(1902-1920)
아우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어 병천 헌병주재소, 천안헌병대, 공주검사국 및 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만세운동 때 입은 자상과 3.1운동 1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당한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유중무(1875-1959)
유관순의 숙부. 지령리교회 최초 교인으로 전도사와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와 공주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끝까지 지령리교회를 지켰다.

유예도(1896-1989)
유관순의 사촌언니, 4월 1일 병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도피 하여 홍성 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노마리아(1898-1982)
유관순의 사촌 올케, 남편 유경석이 유관순과 유예도를 도피시키고있는 동안 유중권을간호했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유윤기, 어린아들 유제 경과 함께 집을 지키면서 일본헌병의 온갖 횡포를 감수해야 했다.

유제경(1917-2012)
유관순의 5촌 조카이자 유중무의 장손, 1919년 4월 1일 이후 어머니 노마리아와 함께 지령리 집에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시무하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소위 불경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중국 해남도에서 노역으로 형기를 마쳤다.

 

김혜은 기자  21cpre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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