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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신앙적 의의(히브리서 1:33-40)홍현설 박사(1911-1990,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한국기독교연합회장 역임)
홍현설 박사.

오늘은 우리가 57번째로 맞이하는 3·1절입니다. 3·1운동의 정신은 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으며 세계사에 나타난 약소민족의 해방운동 가운데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고차원적인 독립 운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저는 독립선언서의 참뜻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설명 해 보려고 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월슨 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서 우리의 3·1운동도 일어나게 된 것이며,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약소 민족 해방의 물결이 우리나라에까지 밀려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입장에서 이 3·1운동을 본다면, 인간의 생존권과 평등주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3·1 운동을 단순한 피압박민족의 저항운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포로가 되어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인 모세를 바르왕에게 보내서 “내 백성을 놓아 보내라”(Let my people go)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이 독립선언서를 읽을 때 마다 놀라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기독교인은 아니었고, 그 중에는 불교도도 있고 유교학자도 있고 천도교인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그 문서가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 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신 이가 일반에게 알려지기는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고 말하지만 누가 이것을 썼든지 간에 너무나도 오묘한 사상으로 가득 찬데에, 우리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이 독립선언서 가운데는 우리의 적국이며 침략자인 일본 제국에 대해서 털끝만큼도 미워하지 않았다는 정신에 있습니다. 선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독립선언을 표명하며 주장하는 것은 순전히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세 가운데 순응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전 인류의 공동 생존권에 정당한 발동에서 된 것이므로 천하에 아무도 이것을 막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2000만 동포가 오로지 양심과 정의의 방패로써 이 운동을 지원한다고 선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로써 속국이 되어 있을 때, 민족의 지도자였던 간디가 비폭력·무저항 운동을 주창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3·1운동의 정신을 볼 때, 이 간디의 운동보다도 우리의 독립 정신이 앞섰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간디가 인도 민족으로 하여금 자기의 적국인 영국의 상품에 대한 비매운동, 즉 보이콧트를 일으켰을 때, 영국에서는 그 결과로 인해서 많은 실업자와 굶주린 자가 생겨났고, 이와 같은 비매운동의 행위는 차라리 전투함을 가지고 영국에서 오는 모든 물자 수송선을 침몰시키거나 차단했던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간디가 사용한 이런 비매운동은 그 방법에 있어서, 도덕적으로는 조금도 정당화한 근거가 없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이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더 효과가 있고 거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오히려 인간 생활에 있어서 힘이라는 것은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어쩔 수 없이 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힘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신 희생시켜서 자기의 손만은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된 「대중 운동」이라는 책을 쓴 에리 호프만이 말하기를 “미움이라는 것은 모든 통제와 고민 가운데서도 가장 영리하게 받아들여지고 포용력이 넓다”고 했으며,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에도, 국민들에게 적국에 대한 증오심을 발동시키는 것은 민족 통일에 커다란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야비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영국의 종군 간호원으로서 출전했다가 스파이 혐의로 적군에게 사살을 당한 에지트 카벨이라는 여성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는데, “나는 애국심만으로 넉넉치 못함을 알았다. 나는 아무에 대해서도 미움이나 악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이 영국 런던에 있는 프라타르크가 광장 위에 있는 그의 조각 아래 쓰여 있습니다. 또한 유명한 사무엘전서는 “애국심이란 악당들의 최후의 피난처”라고 말했는데, 즉 이 말은 우리에게 가장 숭고한 애국심이라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하이네도 기독교의 사랑보다는 고통의 진노가 더 커다란 것을 가능케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재자 히틀러는 그의 반유태주의를 독일의 통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태인을 미워하는 폴란드, 루마니아와 헝가리, 프랑스 사람들까지 그런 미움을 확대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이 미움이라고 하는 증오의 밑바닥에는 정당한 불만보다는 오히려 자기 경멸이 있다는 사실을 에리 호프만은 지적했는데, 즉 증오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와 양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3·1운동 지도자들은 적국인 일본을 관대하게 대했습니다. 과연 이 독립선언서야 말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복을 빌되 화를 빌지 말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구현한 훌륭한 기독교의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3-40년 전 일입니다. 저는 일제시대에 평양에서 살았는데, 소위 도덕재무장운동(M.R.A.)이 평양까지 들어와서 일본 동경에 있는 경시청의 높은 관리로 있는 ‘야마네’라는 사람과 같이 그 도덕재무장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바와 같이 도덕재무장운동은 4가지 절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절대 정직’, ‘절대 순결’, ‘절대 무사’, ‘절대 애’로써, 이 M.R.A.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어떤 때는 자기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런 비밀까지도 피차에 서로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소위 ‘분담’이라는 일을 해오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는 ‘야마네’라는 일본 사람과 같이 평양 을밀대에서 기다림 이라는 그 수풀 속을 거닐면서 깊은 신앙의 대화를 주고받던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원수인 일본사람들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말하니, 잠잠히 듣고 있던 야마네란 사람은 “여러분! 여러분이 일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본 일이 있습니까?”하고 말해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묵묵부답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자기의 좌·우편에 있는 원수와 강도 혹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모든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는데, 이러한 용서의 정신이야말로 기독교 정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독립선언서는 우리의 적국인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사회에 나와서, 동양 지지자로서의 중책을 지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을 밟으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덕의 시대가 아니고 도의의 시대인 만큼 구사상과 구세력에 얽매인 일본 위정자들이 그들의 부자연하고 불합리한 사고 상태를 개선해서 정직한 대원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하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압박민족으로서 우리에게 갖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박해와 고문은 물론, 우리를 정신적·사상적으로 못살게 굴었던 일본 제국에 대해서 이와 같은 권유를 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악에게 지지 말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 기독교 정신으로서, 폭넓은 전망에서 당시의 중국까지를 포함해서 동양 전국이 동고동락의 비운에서 벗어나 다같이 공존공영하자는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정신적인 면에서 일본을 이겼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아브라함 링컨의 유명한 캐티츠버그 연설보다도 혹은 미국의 독립선언보다도, 우리의 독립선언서는 훨씬 차원이 높고 만고에 빛나는 문서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14세기 체코슬로바키아의 교육자인 요한 후스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박해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경시하고 동정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제국주의 제도에 대해서는 피로써 이를 항거할지라도, 그 제도 아래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물이 된 일본 국민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미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지도자들의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정치가들이 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는 설득과 강제, 혹은 자발적인 항복 등의 여러 가지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상례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가 여러 가지 내부의 복잡한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압력이 있을 때에 지도자는 국민들의 주의를 밖으로 전환시켜서 가상적인 적이라도 만들어 국민정신을 통합하는 예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독립선언서에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적을 선의를 가지고 설득하려고 하는 아량을 역력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왜 피차에 망할 일을 계속할 것인가?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근거한 우호적인 정신으로써 난국을 타개해 나가자는 말을 한 것은, 마치 장성한 아저씨가 철없는 조카를 타이르는 듯한 그런 사랑이 얽힌 정신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일본을 책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책망하기에 급한 우리는 타의 잘못과 원한들 때문에 이것을 공격할만한 여가가 없다고 선언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만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의 적국인 일본까지도 무모한 침략의 야욕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하는 민족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정신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만인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 입니다. 그래야만 이 지상에 영원한 평화와 자유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57회 3·1절을 맞이해서, 우리의 선열들이 피 흘려 찾은 이 고귀한 자유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침해를 받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의 자유수호와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다같이 거룩한 민족적 과업에 재헌신하여 하나님 앞에 맹약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쉽고 바르게 풀어 쓴 3·1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십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 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고 지금의 고통을 벗어던지려면, 앞으로 닥쳐올 위협을 없애 버리고 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다시 일으키려면, 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고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 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 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 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뒤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일본의 학자와 정치가들이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 문화 민족을 야만인 대하듯 하며 우리의 오랜 사회와 민족의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다고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남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 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따라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 생겨나고 있다.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이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사억만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 선언은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한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운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 지 4252년 3월 1일(1919년 3월 1일)

조선 민족 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출처 =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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