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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의 재발견> 세상에 대한 무한책임, 웨슬리 정신과 맞닿아 있는 3·1운동하희정 박사(감리교신학대학교)

3·1운동을 ‘단순한 만세운동’로 보는 것은 ‘외눈박이’ 평가
특정개인 업적 및 성취만 부각하는 영웅주의 사관은 곤란
‘국가’와 ‘시민주권’ 강조한 ‘민주공화제’ 성격 재조명 필요
‘탈종교 언어’로 ‘종교 핵심가치’ 실현 역사적 모델로 의미
감리교회 정신 및 학문적 풍토가 주도적 참여 가능케 해

이 글은 2월 27일 인천 국제성서박물관이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주최한 문화강좌에서 ‘3·1운동과 기독교의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행한 강연 원고입니다. <편집자주>

Ⅰ. 3·1운동, 만세만 불렀나?

역사는 기록으로 말하고 기억으로 의미를 얻는다. 100년 역사를 맞은 3·1운동,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3·1운동 하면 누구나 ‘독립’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 태극기를 꺼내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사건. 함께 광장을 누비며 그날의 기억을 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겨준 파란 눈의 선교사 스코필드(F. W. Scofield) 박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뜨거웠던 함성만 기억할 뿐, ‘독립대한’의 미래청사진이 함께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Ⅱ. 한국교회가 기억하는 3·1운동

3·1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1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시민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서명자가 16명이다. 상해임시정부를 세운 주역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기독교계는 지금까지 3·1운동을 대략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해왔다. 첫째, 민족사적 관점이다.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로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린 사건이라는 인식이다. 기독교인들이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이를 주도했음을 밝히는데 집중했다. 둘째, 민중사적 관점이다. 일제 식민체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민중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견해다. 1970년대 이후 주로 형성된 담론으로 민중계층의 역사성과 자발성을 강조하고, 종교적 연대에 관심을 둔다. 두 관점은 선택적 관계라기보다는 시대적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두 관점 모두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①세부적인 사실관계 규명에 집중한 나머지 3·1운동 자체가 갖는 역사적 위상과 성격규명에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 역사에서 사실관계 규명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도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②국내 중심적 사고와 만세시위 위주로 인식하다보니 오히려 3·1운동이 갖는 역사적 확장성과 다양성을 스스로 차단한 측면이 있다. 「3·1독립선언서」가 유일한 매니페스토로 인식되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③‘독립’과 ‘시민주권’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인데, 이를 분리 접근해 3·1운동을 지도자 중심의 역사로 축소시키거나, 구국의 열정과 영웅적 저항 스토리에만 집중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는 3·1운동을 흘러간 과거로만 기억하게 한다.

Ⅲ. 국내외 독립선언문과 3·1운동의 재발견

국내외에서 발표된 독립선언문들을 퍼즐조각 맞추듯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비교하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 동경에서 발표된 「조선청년독립단선언」(일명 2·8독립선언), 국내의 「3·1독립선언서」,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와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등이 소환되었다. 이들은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반쪽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의미다.

다양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발표되었지만 이구동성으로 ‘독립’과 동시에 ‘민주공화’의 실현을 선언한다. 모든 선언문이 “대한의 주권은 대한시민에게 있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권”임을 세계시민사회를 향해 천명한다. 이는 한 개인의 지적 창작물이 아닌 집단지성과 집단실천의 산물이라는 증거다. 선언문은 특정개인의 손을 거쳐 나왔다 할지라도 한 개인의 지적 창작물로 인식되어서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시대의 요구를 담아낸 기록으로써 집단지성과 집단실천의 산물로 접근해야 한다.

실제로 내용구성 면에서도 조율과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흔적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국내외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존재하면서도 한민족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폭발한 운동이 3·1운동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는 ‘5종 세트’ 선언문을 핵심만 짚어서 소개한다.

① 1917년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탄생한 「대동단결선언」은 ‘신한(국)’의 미래로 민주공화국을 처음 공식화한 선언문이다. 20여년 지속된 근대정체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종을 망명시켜 대한제국 망명정부를 세우려던 보황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민주공화제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이루어졌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조소앙이 초안을 마련하고,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이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핵심은 명쾌하다. 한일강제병합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날”이 아니라 대한제국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날”이다. 본래 주권자였던 국민이 다시 “주권을 이양 받았으니, 대한은 이미 국민주권국가다.” 이것이 선언문의 골자다.

민주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익명으로 나붙은 벽보로 독립협회가 주도한 의회설립운동이 실패하고, 입헌군주제를 수용하려던 고종은 전제군주제로 급선회했다. 「대한국국제」가 반포되었는데, “대한제국은 자주독립의 황제국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주권을 갖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후 민주공화제는 불온체제로 내몰렸지만, 오히려 시민사회는 이때부터 민권에 눈뜨고 주권의식을 갖게 되었다. 특히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는 전제군주제에서는 황제의 선택에 따라 나라가 통째로 일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목도하면서 시민(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공화국을 꿈꾸게 되었다.

② 「대동단결선언」은 1919년 2월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모체가 된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민주공화제를 천명하고, 그 청사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핵심은 삼균주의 즉 ‘균권’을 정치 원리로, ‘균부’를 경제 원리로, ‘균지’를 교육 원리로 삼아 평등사회를 실현하는 것. 핵심가치는 인간평등과 만인존엄의 회복이다. 눈여겨 볼 점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계급갈등의 끝없는 대결을 부르는 사회주의의 근본적 한계들을 대동평화사상으로 승화시킨다.

초안자인 조소앙에 따르면, 동경과 서울에서 발표된 선언문들이 공식 발표되기 전 선언문 초안이 먼저 만주 길림으로 전해졌고, 두 문건을 검토한 후 완성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을 매듭짓는 파리강화회담이 열렸다. 일본은 승전국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되었고, 한민족의 독립은 논의 테이블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여준, 조소앙, 김좌진, 김원봉 등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미국, 만주, 러시아 등 각 지역 대표자 39명이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③ 같은 지역에서 나란히 발표된 「대한여자독립선언서」는 자매선언서의 성격이 짙다. 여성들이 작성한 유일한 한글선언서로 서명자 8명이 모두 여성이다. 1985년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이 자료를 기증할 때 처음 발견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가 법리적 타당성과 정교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면,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남녀동등의 원칙과 주권재민의 원리에 입각해 여성들의 주체적 참여를 독려한다. 또한 함축적인 언어와 간결한 논리를 사용했다. 특히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시민주권을 넘어 민중이 인류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해 남성선언문을 보완했다. 역사학자 박용옥은 신학문을 공부한 기독교 여성들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문체나 언어패턴이 만주망명지 가사문학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혁신유림 문중여성들이 작성했거나 이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선언문일 가능성이 높다.

④ 20여일 앞서 발표된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도 한일강제병합의 부당함과 민주주의가 실현된 신국가 건설에 대한 염원이 담겼다. 일본의 기만과 조약위반으로 한민족은 피압박 민족이 되었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모든 자유를 빼앗겼고, 인권침해와 차별교육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낱낱이 폭로한다. 동시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전리품 나누기의 허울 좋은 명분이 아닌, 국제질서의 기본원리로 실천하도록 국제사회를 압박했다. 특징은 초안자 이광수를 포함해 11명의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⑤ 국내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시민대표로 나섰고, 시민들은 광장에서 독립대한의 주권자임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3·1독립선언서」는 민주주의나 민주국가라는 개념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선명하게 담아냈다. 철저히 대중 눈높이에 맞춰진 선언문이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모두 금지된 상황에서 대중 집회가 가능했던 공적 공간은 종교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대중의 신뢰를 받는 종교지도자들이 시민사회의 대표로서 사회적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불교의 경우 일본의 직접 관리체제 하에 있었고 사찰이 깊은 산중에 위치해 대중접근성이 매우 취약했다. 실행방향과 방법에 대한 세부논의는 독립을 ‘제2의 동학혁명’으로 인식했던 천도교 측에서 먼저 진행했다. 대중접근성이 가장 용이했던 기독교계는 시민들을 광장으로 이끌고 참여를 증폭시켰다. 천도교와 기독교의 절묘한 연대가 3·1광장을 만들어낸 셈이다.

⑥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3·1운동의 역사적 결정체다. 감리교회 현순 목사가 국내에서 천도교로부터 받아간 독립자금이 씨앗자금이 되었다. 초대의장으로 첫 회의를 진행한 상동교회 출신 이동녕은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군주제를 부활시키려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이 나라에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어 총 10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대한민국 헌법으로 반포하고, 제1조에 ‘민주공화제’라는 단어를 명시했다. 이는 헌법에 국민주권국가라는 이념을 새겨 넣은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Ⅳ. 3·1운동의 재평가가 필요하다
 
첫째, 3·1운동은 만세시위와 광장진압으로 끝나지 않았다. 1890년대 말부터 20여 년간 진행된 근대정체에 대한 논의에 마침표를 찍어 민주공화국의 시작이 되었고, 시민주권시대의 첫걸음이 되었다. ‘독립’과 ‘민주공화’의 실현은 3·1운동을 이끈 쌍두마차요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3·1운동이 탄생시킨 민주공화제에서 ‘국가’와 ‘시민주권’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40년의 일제강점기를 대가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해방 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대한민국이 근대정체에 대한 갈등이나 논쟁 없이 민주공화국으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누구의 힘이 아니었다.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헌법도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거나 미국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다. 국민주권의 신념을 지켜온 시민들이 오롯이 만들어낸 역사의 공유자산이고 한민족의 고달팠던 역사가 고스란히 체화된 결정체였다. 불행히도 해방 후 한국 사회는 타민족의 탄압 아래 일궈낸 3·1운동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내지 못했다. 그 대가로 전쟁과 분단을 경험했다. 최근 미국을 동경한 탓인지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건국의 아버지’를 굳이 세우겠다는 이들이 있다. 굳이 세워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시민광장’을 스스로 열고 ‘민주공화’를 세운 모든 시민이어야 한다. 공동체가 함께 이룬 역사에서 ‘나 홀로’ 주인공은 없다.

같은 맥락에서 기존연구의 한계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만세시위와 민주공화의 수립을 갈라치기 연구한 것이다. 뗄 수 없는 관계를 분리 접근한 것이 결정적인 오류였다. 즉 우리는 3·1운동을 외눈박이 역사로 읽어온 셈이다. 이로 인해 3·1운동은 100년에 이르는 지금까지도 단순한 만세운동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저평가다. 특정개인의 업적이나 특정단체의 성취만을 부각시키는 영웅주의 사관으로는 3·1운동의 역사적 확장성과 다양성, 그리고 세계사적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다.  

둘째, 3·1운동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 탈종교적 언어를 통해 종교의 핵심가치를 실현한 역사적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감리교 지도자들이 주역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감리교회의 정신을 계승한 학문적 풍토에 있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민족의 정체성과 정신적 가치인 대동평화사상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배움에 열린 태도를 견지하고, 근대사상인 민주적 사유의 훈련공간이었다는 방증이다.

지금까지도 감리교신학대학교는 가을축제로 ‘대동제’라는 이름을 지켜오고 있다. 당시 감리교신학교는 종교교육과 시민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진 특별한 공간이었다. 1920년대 민주주의의 원리를 직접 훈련하고 실천한 장이었고, 1930년대는 토착화 신학을 싹틔웠다. “세계가 나의 교회(교구)다”라는 웨슬리의 선언이 살아있었던 공간이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선언은 단순히 세상을 교회로 채우라는 말이 아니었다. 교회는 세계(사회)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가지는 공동체라는 선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 무한책임의식을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존 웨슬리의 감리교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셋째, 3·1운동의 재발견은 미래 과제를 던져준다. 3·1운동을 이끌어낸 기독교의 학문적 풍토와 교육, 기독교의 주역들을 근대 시민사회를 연 사회적 동력으로서 집중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교회는 물론 시민사회와 함께 공유할 수 있을 때, 기독교는 교회뿐 아니라 시대의 예언자로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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