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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의 민족사 함께 걸어간 순교자 오현경‧의명 부자의 하나님 사랑‧나라 사랑3‧1절 만세운동으로 3부자가 함께 ‘투옥’
감신대학 졸업도 ‘동기’로 특이한 동행
한국전쟁 때 공산군에 ‘순교’까지 닮은꼴
100년만에 ‘건국훈장’도 함께 받아 화제
일본 총독부의 당시 판결 기록. 오의명과 이상준이 신학생으로 기록돼 있다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가득했습니다.100년 전 31독립운동이 시작된 바로 그날각각 다른 곳에 있던 네 분이 같은 시간에 만세를 불렀습니다경성고보 4학년생 상훈 선생이 서울 탑골공원에서숭실학교 학생 노원찬 선생이 평양에서남본정 교회 오현경 목사가 황해도 해주에서무역상을 하던 전성걸 선생이 평안남도 안주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가 3천리 방방곡곡 울려 퍼졌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면서 기념사를 통해 초청된 유공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이 가운데 등장한 오현경吳玄鄕 목사는 황해도 해주 남본정南本町교회를 시무하던 감리교회 목사로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닮은꼴 부자나란히 독립유공자 서훈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오현경 목사는 대통령의 언급 뿐 아니라 또 다른 사건으로 다시 부각된다오현경 목사의 둘째 아들로 협성신학(현재 감리교신학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오의명吳義明 목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일이다아버지와 아들이 31운동을 주도한 공로가 인정돼 같은 훈장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해주에서 목회하던 감리교 목사로아들은 서울에서 공부하던 감신대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해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해주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오현경 목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이 추서된 오의명 목사

 

오현경의명 부자의 이런 삶은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의 닮은꼴이다

오현경 목사는 해주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아들 오의명은 서울에서 학생 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체포돼 8개월을 서대문형무소에 지내야 했다부자가 만세운동으로 함께 일경에 체포돼 함께 옥고를 치른 것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그날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현경은 1919년 2월 20일 서울의 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가 보낸 김명신金明信으로부터 독립선언서 3백여 장과 최성모의 서신을 전달받았다그리고 오현경은 그 날 밤 남행정南幸町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황학소黃鶴巢·임용하林容夏·이동혁李東赫·최명현崔明鉉·김창현金昌鉉 등을 모아놓고 독립운동에 관한 방법을 논의하였다논의 결과 이들은 3월 1일에 신자들을 남본정 예배당에 집합시켜 광무황제의 봉도식奉悼式과 함께 독립선언서 봉독식奉讀式을 거행하고선언서를 배포할 것을 결의하였다드디어 3월 1일 오후 2시경 남본정 교회에는 18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들었다오현경은 이들을 주재하여 봉도식을 마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그리고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남은 선언서는 김창현으로 하여금 각처에 발송하도록 하여 만세운동을 확산하려고 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오의명 뿐 아니라 첫째 아들인 오인명吳仁明(월남 후 새문안교회 시무장로)도 아버지를 따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3부자가 모두 투옥과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교민신문 신한민보新韓民報는 4월 29일자에서 오현경 목사가 악형을 당해3부자가 피 옷을 입어” 제하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요사이 모국으로부터 온 통신을 의지한 즉황해도 해주교회 목사 오현경씨와 그 자녀 오인명오의명 양씨 등 세 선생은 이번 우리 민족 대활동에 그 열성과 정력을 다 받쳐 활동한 바 지난달에 왜적에게 붙들려 감옥에 갇힌 후 몹쓸 악형을 당하여 전신에 피가 흘러 붉은 옷을 입고 고문을 받는 중이더라.”

오현경 목사 부자의 투옥 소식을 전한 미국 교민신문 신한민보 4월 29일자 기사.

 

 

신한민보 4월 29일자

(신한민보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0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하던 것을 격일간으로 변경해 궁금한 국내 소식을 교민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려 애썼다.) 

 

  졸업도 함께순교도 함께 한 부자

  오의명은 출감이후 복학해 1921년 12월 21일 감신 7회로 졸업한다공교롭게도 다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감신에 입학한 아버지 오현경 목사도 같은 해 아들과 동기로 신학교를 졸업하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당시 이들 부자와 같이 졸업한 이는 이은택방기순안석준전재풍 등 모두 6명이다

이들 부자의 닮은꼴 행적은 죽음까지 이어진다평양에서 목회하던 오의명 목사는 해방 후 평안도 지역에서 목회할 때 공산당의 감시와 폭행이 점점 심해져 이를 피해 부친 오현경 목사가 목회하던 고향 해주로 피신하여 교인들의 월남을 돕다가 공산군에 체포돼 UN군의 평양수복 이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오의명 목사의 3남 오세욱(재미씨는 자신이 북진하던 미군을 따라 해주에 들어가 확인한 내용이라며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어머니의 말씀이 아버지의 순교가 해주형무소였다고 한다다행이 그때 형무소 담당 의사가 잘 아는 목사님의 자제였기에 아버지의 운명과 묘지 등의 내막을 할아버지(오현경)께 알려주었다그러나 할아버지가 묘지를 찾으려 애썼지만 찾지를 못했다.” 

아버지 오현경 목사도 그 직후인 14후퇴 무렵 순교를 당해 한국전쟁 시기 부자가 모두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하는 같은 길을 걸었다공훈록에는 오현경 목사가 1972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유족들은 사실과 다르다며 오현경 목사 역시 공산군에 끌려간 뒤 생사를 알지 못한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들 부자가 공산당을 싫어하고 대항하면서도 끝내 월남하지 않고 북한 지역에 남아있다 순교를 당한 이유를 유족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14후퇴 때 이 배가 마지막 배가 될지 모르니 같이 남하하자고 권유한 김응순 목사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해주에 남으셔서 그 후 생사 불명이 되셨습니다남하를 거절하신 이유는 북쪽에서 남하하려고 해주 방면으로 오는 피난민 교인들이 해주에 가면 오 목사님이 계시니 그분을 만나 남하하는 길을 찾으라는 말을 듣고 몰려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살겠다고 남하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당시 해주가 북한 지역의 주민들이 월남하기 전 집결하는 통로와 같은 요충지였고 이들을 끝까지 돕기 위해 오 목사 부자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가는 혹독해서 아들에 이어 아버지 오현경 목사도 공산군에 체포된 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오의명 목사의 장손녀인 오가실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전하는 말이다. “2000년대 초반에 남북관계가 일시 호전됐을 때 북에 남은 할머니와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 한 일이 있습니다증조 할아버지(오현경 목사)와 할아버지(오의명 목사)의 생사와 행방은 확인하지 못했고 할머니(송경선)와 막내 고모는 정치범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가 할머니는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비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들을 잊지 않았다. 2001년 아버지 오현경 목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그리고 20년 가까이 흐른 지난 3월 1일 100주년을 맞는 31절을 기해 아들 오의명 목사에게도 아버지와 같은 애족장이 추서된 것이다오현경의명 부자에 대한 훈장 추서가 다른 이들에 비해 늦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이들이 북한에 남아 생사확인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31 운동 이후의 모습

  감리교 목사와 신학생으로 부자가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유공자로 큰 족적을 남긴 셈인데정작 감리교회 안에는 이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가장 큰 이유는 이들 부자가 1936년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사이에 체결된 선교지 분할 협약이 종료되면서 장로교회로 전직했기 때문이다이것까지 부자는 같은 길을 걸었다.

오현경 목사는 1920년 평양감옥에서 출옥한 후 서울 번리교회 및 경기도 여주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감신대를 졸업했고 1925년 해주 탁영대교회, 26년 해주동문교회에서 시무했다이 때 오 목사는 신간회新幹會 해주지부 간부로 활동하는 등 민족 독립운동에 계속 헌신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 1928년에는 해주 구세병원 및 폐결핵 요양원 원목, 1930년 해주 광석동교회, 1933년 황해도 천태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36년 인명의명 두 아들과 함께 해주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한 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겼다그 뒤 황해도 안악송화 등에서 시무했으며 순교 직전에는 자신이 설립한 해주 남행정교회를 섬겼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오의명 목사는 배재학당을 거쳐 감신에 입학한 뒤 2학년이던 1919년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여해 체포됐으며, 1919년 11월 8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남아있는 기록은 1921년 감신대를 졸업하고 감리교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해 황해도 서부연회 연안남 구역에 파송된 것이 전부다이후 장로교회로 옮겨 1936년 평남 평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황해도 강선태성태평교회 등지에서 시무했다. 1945년 해방이후 공산당의 박해가 심해지자 오의명 목사는 목회를 중단하고 해주로 돌아와 부친을 돕다가 반공을 사유로 체포돼 해주형무소에 투옥된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오의명 목사의 부인은 송경선 여사로 감신대 선배(5회 졸업)인 송익주 목사의 따님이다

4일 서울남부보훈지청에서 오의명 목사의 훈장을 전달받은 유족들. 가운데 증서를 들고 있는 이가 손자 오제국씨.

 

  100주년 맞아 수여된 건국훈장 

  오의명 목사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 전달식은 지난 4일 서울남부보훈지청에서 열렸다오 목사의 유족 10여명이 참석했으며 손자 오제국 씨가 가족을 대표해 이용기 서울남부보훈지청장으로부터 훈장을 전달받았다오 목사는 송경선 여사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으며 해주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한 막내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월남했고 현재는 3남 오세욱 씨만 생존해 있다훈장을 대표로 받은 오제국 씨는 2남 오세운 씨의 장남이다이용기 보훈지청장은 이 자리에서 국가를 대표해 유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며유족들은 고인이 54년의 짧은 생애를 하나님 사랑나라 사랑으로 굵게 사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오가실 교수와 남편 안경덕 선생은 훈장전달식이 끝난 후 기자와 만나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건국훈장을 받게 된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면서, “31운동 당시 신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조부가 해주로 와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과 전달 등의 준비 작업을 진행했으며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파고다공원 집회에 참석한 것이라고 뒷이야기도 들려주었다오가실 교수에 따르면 오의명 목사는 당시 각 학교 대표 중 하나로 시위대를 이끌다 일경에 체포됐다는 것이다

조부와 증조부의 족적을 따라 애국애족과 바른 신앙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오가실 교수는 실제로 연세대 간호대학 교수로 조기은퇴한 뒤 남편과 함께 몽골로 가 국제울란바타르대학교에서 11년째 현지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두 할아버님 목사님이 살아 계시다면그 시절에 어떻게 해서 부자가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그래서 우리 후손에게 이 귀한 축복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까묻고 싶습니다하지만 답해 주실 분이 세상 천지에 없으니 천국에 가서 여쭐 수밖에 없습니다.” 오가실 교수는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은 유족 중 유일하게 오현경·의명 목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오의명 목사의 장손녀 오가실 교수(오른쪽)와 남편 안경덕 선생.

  

당시 감리교 청년들 역할 재조명돼야

  오의명 목사의 건국훈장 추서를 계기로 31운동 당시 감리교 청년 및 신학생들의 역할과 참여에 대한 조사 연구도 있었으면 아쉬움이 제기된다그 동안의 연구가 감리교 목사로 독립선언에 참여하거나 31운동에 참여한 이들에 대해서만 집중돼 온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학계의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이가 감리교 해주읍교회 정재용鄭在鎔으로 알려져 있고조선총독부의 체포 및 재판 기록에도 오의명과 이상준李相駿이 각각 신학교 2, 3학년으로 기록돼 있다. (감신대 역사 자료에는 이상준에 대한 기록이 없다정재용은 1990년 애국장을 받았으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경신학교 출신으로만 소개돼 있고이상준은 포상기록 조차 없다.)

정재용은 당시 해주읍교회 출신으로 민족대표에 참가한 최성모 목사를 따라 상경해 행동을 같이 했으며민족대표였던 박희도 전도사가 2주일 쯤 전인 2월 17자신의 고향인 해주의 정재용에게 편지를 보내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획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니 시급히 상경하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희도가 이처럼 YMCA와 자신의 출신지 해주를 중심으로 청년 학생을 조직적으로 동원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해주출신 신학생이던 오의명도 사전에 이들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해주와 서울을 오가며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오가실 교수의 증언대로라면 오의명의 역할이 단순 가담자 이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없고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줄 이도 생존해 있지 않다

가한나 기자  hanna@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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