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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1023호 사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항쟁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40년 전의 사건이 여전히 아픔으로 남고 사회적 논란을 반복하는 이유는 그날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과 학살 책임자들의 사과 및 처벌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5·18 특별법으로 어느 정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뤄졌지만, 이후 정부가 취한 모호한 태도는 제대로 된 ‘청산’도 ‘용서’도 이루지 못한 채 광주의 한恨과 굴절된 역사의 상처를 봉합해 버린 결과를 낳았다. 마치 4·19 기념탑의 시구詩句를 연상시키듯 “해마다 그날이 오면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아픔과 상처가 재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한 탓이다. 또 관련 책임자들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역사 앞에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이유도 크다.

최근 국회 안에서 논란이 된 5·18 망언 소동도 그렇고 연일 광화문 감리회관 앞을 소란스럽게 하는 황당한 주장의 진상규명 요구도 그렇다. 역사 앞에서 최소한의 양심과 부끄러움이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셈이다.

지난 11일 국민들은 하루 종일 이어지는 뉴스에 착잡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을 것이다. 이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과 관련한 회고록 내용으로 고소를 당해 광주 법정에 끌려간 날이다. 우선은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한걸음 제대로 전진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전직 대통령을 법과 여론의 심판대로 끌어내는 이 소동이 답답하다. 그러나 더욱 참담한 것은 전직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다. 거창하게 역사의 책임을 논하기 이전에 당시 희생자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못할 것 같다. 발포명령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전직 대통령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다. “이거 왜 이래” 이를 보도한 한 신문의 촌평이 걸작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중용中庸에 보면 이런 공자의 말이 소개된다. ‘지치知恥는 근호용近乎勇’, 즉 수치를 안다는 것이 용기에 가깝다는 말이다. 공자는 배우기 좋아하는 것은 지知, 노력해 행하는 것은 인仁이라면서 이 세 가지를 알면 수신修身하는 바를 알게 되고, 수신하는 바를 알면 사람 다스리는 바를, 사람 다스리는 바를 알면 곧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바를 알게 된다고 가르쳤다. 지도자로 나서려는 이들이 곱씹어봐야 할 교훈인데, 배우고 바르게 행하려는 이, 도리를 알고 수치를 아는 지도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다.

자신의 추한 허물은 감추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짓밟거나 빼앗아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비뚤어진 욕망의 지도자들이 정치계는 물론 우리 교회 안에도 활개를 친다.  

거짓과 위선이 드러나 창피를 당한 일이 불과 얼마 전인데 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와 또 다른 거짓으로 자기 처신을 합리화하려는 이들이 보인다. 모사와 간계로 세상을 속이고 자기의 이익을 취하거나 공명심을 얻으려는 이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감리교회에 다시 혼란의 틈이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 등장하는 얼굴들은 오히려 수치를 알고 물러서야할 식상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이 했던 행태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사과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뻔뻔한 얼굴로 판관判官을 자처하는 이들, 자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에는 앞장부터 서는 이들을 보면 딱하기 그지없다.

그래!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원하는 욕심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과 하늘이 아는 진실을 어찌 속이고 신앙인을 자처하려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정파의 입장도 좋고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최소한 거짓을 말하지는 말아야 하며 시정잡배들처럼 힘을 남용하거나 상대방을 속이는 간계를 써서도 안 된다. 일구이언一口二言, 위치가 달라졌다 해서 말을 쉽게 바꾸거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썩은 내 나는 세상 정치인이나 할 짓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번뜩 스치는 걱정이 있다. 차라리 위선이요 거짓이라면 다행인데, 혹시 정말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요즘 간간히 사용되는 용어 가운데 ‘에코체임버(Echo Chamber 메아리를 만들어 내는 방) 효과’란 말이 있다. 같은 부류의 사람끼리 모여서 비슷한 의견만을 나누다보디 그게 다수라고 믿는 일반화의 오류라고 한다. 남의 말은 들을 생각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계속 반복하니 그 논리가 증폭돼 마치 진리나 진실인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해서 국민을 실소失笑하게 한 어느 전직 대통령 부인의 태도나 감리교회 안에 잡음과 추한 뒷거래를 주도하던 이들이 서로를 감리교회의 수호자처럼 추켜 세워주는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정말로 몰라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병病이다. 우선 자기 방에서 나와서 제대로 된 세상의 소리, 양심의 울림부터 듣기를 처방으로 권하고 싶다.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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