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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간 신앙인, 정치인 ‘여운형’3·1운동 100주년 기념 포럼...몽양의 ‘좌우합작’론 재조명
이정배 박사 발표자로 나서... 民중심 기독교적 배경 강조
“민족을 이념보다 우선한 몽양의 정치사상 재평가돼야"
지난18일 감신대에서 열린 발표회. 좌로부터 사회자 최대광 목사, 발표자 이정배 박사, 논찬자 김정숙 교수, 장원석 사무국장

“좌우합작은 민족을 위해 몽양이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갔던 길인 까닭입니다. 체제 안에서 체제 밖을 홀로 상상하고 꿈꿨던 결과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하늘의 가치를 이 땅에서 실현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그 길은 폭력에 의해 쓰러질지언정 비폭력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걸을 수 있었습니다. 몽양은 바울처럼 민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존재였습니다.”

이정배 박사(전 감신대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는 지난 18일 서울 서대문 감신대 웨슬리채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과 해방공간에서 보여줬던 그의 행적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종교인 여운형, 공산주의자로 매도될 수 없어

‘몽양(夢陽) 여운형과 통일’을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생명평화마당(상임대표 한경호 목사)이 3·1운동 100주년 기념포럼으로 마련한 것으로 이정배 박사가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 그 기독교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뒤 김정숙 교수(감신대)와 장원석 사무국장(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의 논찬이 이어졌으며 한경호 목사의 개회사와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이부영 전 의원의 축사가 있었다.

한경호 목사는 개회 인사를 통해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반복되는 오늘의 사회 현실에서 몽양의 폭넓은 철학과 식견, 그리고 정치적 혜안이 그립다”면서 몽양의 사상적 배경 가운데 “민족을 이념보다 우선시한 민족주의적 입장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동학사상, 평양신학교를 다니고 목회활동을 했던 기독교인의 모습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직전 몽양의 모습<사진 출처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이정배 박사는 발표를 통해 “해방정국에서 몽양이 주창한 ‘좌우합작’론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 일체의 이념을 수용, 극복하려는 시도였다”면서 이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박사는 몽양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민족주의자”라고 표현하면서 “‘좌우합작’론이 정치적 이상을 펼치는 방책이라면 그 토대인 민民 사랑은 종교적으로는 천부경, 단군사상을 비롯한 실천적 유교와 기독교,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간의 통섭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좌우합작의 정신은 민족차원의 계급구조를 타파하고 미·소의 국제적 영향력마저 넘어서며 최종적으로 남북연합까지 이루려했던 시대를 앞선 이념”이라고 평가한 이 박사는 “이 길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좁게 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으나 그로서는 가야할 길이었다”면서 “그에게 정치는 종교적 확신의 가시적, 실천적 행위라 봐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이어 “몽양은 좌우합작의 신념을 이루려다 해방 전에는 친일논란으로 고통 받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란 오명을 뒤집어 쓴 채 62세의 나이로 거리에서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고 아쉬워한 뒤 “해방 후 몽양의 정치활동은 비록 좌익 성향이 강했어도 좌우익 모두를 아우른 것이지 결코 공산주의자로 매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평양신학교 출신의 설교가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활동한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로 8·15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려 독립국가 건설과 좌우 합작에 힘쓰다 우익 청년에 의해 암살당한 비운의 정치인이다.

몽양은 도산 안창호 등과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이 시기 손문,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혁명과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4년간 복역했으며 출소 이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강제 폐간된다.

해방이후에는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에 앞장서 김일성과 수차 회담을 갖기도 했다.

좌우익의 극한 대립 속에 암살당한 몽양은 한국전쟁과 냉전이 이어지면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2005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된다.

이후 몽양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가려져왔던 기독교계 활동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날 발표회도 몽양의 정치적 사상과 기독교적 배경을 재조명하는 자리로 관심을 모았다.

몽양은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기독교를 접했으며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었던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다 평양신학교까지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발표회에서 논찬자로 나선 장원석 사무국장은 “여운형이 1906년 기독교에 입교한 이래 중국 망명 초기까지 폭넓은 기독교 활동을 펼쳤다”면서 “따라서 독립운동 당시 그의 활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원석 사무국장은 몽양이 17촌 친척 여병현의 권유로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기독교를 접했다고 설명했다. 여병현炳鉉은 박영효 내각에서 선발한 관비유학생 출신으로 일본 게이오의숙을 거쳐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이 때 스코필드 부자와 인연을 맺었다. 귀국한 뒤에는 배재학당교사로 재직하면서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전덕기 목사와 함께 상동청년학원을 후원하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구국운동에 나섰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여운형은 1906년 부친상을 당한 뒤 일가 모두가 기독교에 입교하여 고향인 양평 신원리 묘골에 광동학교光東學校와 묘곡교회를 설립한다. 장 사무국장은 “이 때 그에게 입교를 권유하고 학교와 교회설립을 지원했던 사람이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 선교사 클라크(곽안련)였다”면서 “이후 여운형은 클라크 선교사를 도와 승동교회의 조사(助事, 전도사)로 활동했다”고 소개했다.

여운형은 또 “당시 구국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던 상동교회와 전덕기 목사가 주최하는 상동청년학원에도 참여”했으며, 이곳에서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재, 여준, 주시경, 김규식, 박은식 등 상동그룹으로 불리는 이들과의 교류가 이후 그가 독립운동가로 변모하는데 주요한 인적기반이 됐다”는 것이 장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여운형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다니면서 YMCA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전도집회, 사경회 등의 활발한 기록을 남겼으며, 특히 질레트 선교사가 창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 ‘황성YMCA 야구부’를 이끌고 최초의 해외 원정경기를 일본으로 다녀온 일도 있다.

여운형은 191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장로교선교회가 운영하던 남경 진링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16년 상해로 가 선교사와 교사로 활동하다 1919년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1913년 8월 1일 제1회 하기대사경회와 몽양<사진 출처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1925년 상해에서 ‘황성YMCA 야구부와 몽양<사진 출처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좌우합작’론에 나타난 토착 기독교 정신

이정배 박사는 이와 관련해 “그동안 정치가 여운형의 그림자 속에 가려져 평양신학교 출신의 전도자이자 설교가였던 그의 족적이 잘 해명되지 못했다”면서 “상해 임정 시절에도 그는 교회 지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거류민단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다”고 소개했다.

이 박사는 따라서 “일제 치하를 거쳐 해방정국을 살았던 정치가 몽양의 자의식 속에 기독교적 영향력을 찾는 일이 소중하다”면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했기에 그가 펼쳤던 좌우합작의 신념 역시 이런 선상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몽양의 ‘좌우합작’론에 나타나는 기독교적 요소는 “서양에서 건너온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니라 민民을 사랑하는 토착적 기독교신앙이 이념적 배경”이라고 해석한 이 박사는 “오늘날 주류 기독교가 거짓뉴스로 이념논쟁을 부추기며 남남 갈등을 야기시키는 현실에서 몽양의 정치철학에 담김 기독교성이 더욱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논찬자로 나선 김정숙 교수도 “색깔론이 난무하는 어려운 정국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묻는다”면서 “적대적 세력을 만들어야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위기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현 주소에 몽양의 ‘좌우합작 민족주의론’은 많은 점을 시사하며 도전한다”고 평가했다.

장원석 사무국장은 “기독교는 3·1운동을 시작으로 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해방 후 통일운동, 독재정권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중재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최근의 기독교계는 북한은 물론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을 추구하는 이들조차 사탄으로 보는 이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시하면서 “이 같은 편향적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운형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관용주의와 포용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실패한 이상,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몫

“결과적으로 몽양은 좌우 양 세력으로부터 배척당한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평가 받았다”고 지적한 이정배 박사는 “그러나 몽양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그 일은 몽양이 좌우합작을 통해 남북연합을 시도했듯이 우리 역시 민족 구심력을 증폭시켜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 가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오늘의 상황이 몽양의 시대와 흡사하다고 말하는 이 박사는 “종전선언과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 몽양의 시대처럼 남남갈등의 극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면서 “몽양의 말대로라면 민족의 주체성 즉 민족적 구심력이 외세의 원심력을 이겨낼 만큼 더욱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3·1 선언 백주년을 맞은 이 땅은 지금 절대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하는 이정배 박사, “남북적대를 지속하든지 아니면 분단체제를 극복해 나갈 것인지 택일해야 한다”고 말한 뒤 “사람이 만든 이념을 부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면서 “3·1 운동의 주역임을 자처한 기독교가 이 책임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마무리했다.

1935년 사진 좌로부터 몽양,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사진 출처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1947년 귀국하는 서재필을 마중나간 몽양. 좌로부터 김규식 서재필 몽양<사진 출처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18일 발표회에서 장원석 사무국장이 몽양 관련 사진을 소개하며 설명하고 있는 모습
발표에 앞서 축사하는 이부영 (사)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참석자 기념촬영

 

가한나 기자  hanna@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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