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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 병원’ 다시 기대하는 것이 꿈같은 일일까?강경신 목사(인천 기독병원 원목실장)

“인천기독병원 100년, 감리회 의료선교사를 기억하며
셔우드 홀·문창모·류형기의 헌신과 결단을 재평가해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료하는 병원을 만들어 보자”

인천기독병원의 옛 모습.

 

로제타 홀이 설립한 인천부인병원과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선교사 한 분이 더 있다. 1922년 한국에 왔던 코스트럽(Alfrida B. Kostrup)이다. 그녀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다음 해부터 인천부인병원 책임자로 일했다.

1924년 인천 부인병원은 Baby Clinic을 열어 여성에서 아이까지 진료해 주었다. 선교사 보고(Minutes of the Korea Annual Conference 1929년 6월)는 1928년 6월부터 1929년 5월까지 인천부인병원이 진료한 환자가 3210명이었다고 기록한다.

1931년 인천부인병원은 미국 의료사업회의 도움을 받아 입원실을 갖추며 현대적인 병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의사, 간호사 각 한 명이었던 병원 직원도 코스트럽 외에 여의사 2명, 간호사 2명, 전도부인 1명, 잡부 1명으로 늘었다.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릴 때 전도부인은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했으며, 환자들이 요청할 경우에는 가정을 심방하며 예배를 드리고 기도했다고 ‘감리교 여성사’(張炳旭, 1979)는 기록한다.  

시간이 갈수록 인천부인병원은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고, 인천과 주변 지역 주민의 건강과 위생을 향상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하던 병원은 1940년 일본이 코스트럽을 강제로 추방하면서 문을 닫게 된다.

미·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는 미국 선교회 소유였던 인천부인병원 건물을 적산으로 몰수해 접대부 검문소로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천부인병원 건물은 병원이 아니라 미 군정청의 정보기관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병원 건물은 미 감리교회로 반환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군부대가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감리교회가 인천에 병원을 개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미 감리교회가 군부대가 사용하던 인천부인병원 건물을 내주어, 인천시 율목리 237번지의 병원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회고하며 강석봉 박사(인천기독병원 초대원장)는 인천기독병원 40년 약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51년 가을 6·25 동란으로 산산조각이 난 감리교단은 서부연회에서 피난 온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남한에 산재한 교회를 수습하여, 1951년 11월에 부산에 있는 장로교 중앙교회를 빌려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를 열었습니다. 총회에서는 총리원을 재조직하고 교단의 틀을 바로 잡는 일을 하였으며, 교회로서 해야 할 가장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가를 논의 한 끝에 고 유형기 감독님과 사회국 문창모 위원장님의 합의로, 몇 곳에 병원을 세우게 되었는데 인천과 강화와 천안이 선택되었으며, 1952년 봄이 다 가기 전에 동시 개원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진행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2년 4월에 발행된 ‘감리회보’는 병원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더 밝힌다. 기고를 통해 문창모 장로(사회국 위원장)는 “지난 (1952년) 1월 13일에 모였던 중앙협의회와 또 총리원 이사회 실행부에서 절대적인 찬성을 얻어 (1952년) 3월 중에 인천과 원주 두 곳을 착수하고, 인천은 여선교부에서 경영하던 전 부인병원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강석봉 선생이나 박창혁 선생 같은 명망이 높고 훌륭한 기반을 가지신 좋은 권사 일을 보시는 의사 두 분의 자발적인 봉사를 받아 불원간 시작을 하려고 인천 동지방과 서지방에서 선정한 7명의 이사회도 구성이 되었으며 건물도 수리 중에 있다고 말하였다. 

문창모 박사는 이어 병원을 할 수 있는 건물이 50여평 준비 되고 좋은 의사를 구할 수 있다면, 직원이 감리교인으로 구성된 병원을 “감리교 ◯◯지방 기독병원”이라는 간판을 걸어 열 개를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사회국 위원장이었던 문창모 박사와 유형기 감독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궁핍했고 고달팠을 피난기에, 시급히 해야 할 일도 많았을 텐데, 왜 병원이 감리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사업이라 합의했을까?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예배당과 흩어진 교인들, 가진 재산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감리회 총회는 어떤 생각과 철학을 가졌기에 남한에 병원을 열 곳이나 세우자고 의논하며 뜻을 모아 추진하려 했을까?

어쩌면 그 이유는 문창모 박사와 셔우드 홀과의 만남에서 출발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셔우드 홀과의 사귐을 통해 문창모 박사의 마음 깊은 곳에는 ‘홀과 그의 부모, 그리고 선교 초기 한국에서 사역했던 의료선교사들이 한국 사람에게 보여준 헌신적인 사역’이 자리 잡게 되어 ‘병원이 먼저’ 라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한국 사람들을 치료했던 의사의 모습, 한국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한국 문화와 민족을 사랑해 주었던 의료선교사들의 사역 정신’이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재현되고 다시 꽃이 피듯이 계승되고 발전되면,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문창모 박사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문창모 박사가 감사하며 소중하게 생각하는 ‘의료선교사들의 사역 정신’의 예가 될 로제타 홀의 일화 하나가 있다. 이야기는 로제타가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로 거슬러 간다.

감리회보에 실린 문창모 박사의 기고.

화상으로 세 손가락이 붙어 손바닥 쪽으로 굽어 자라는 16살의 소녀가 치료를 받으려고 로제타 홀을 찾아 온 일이 있었다. 로제타 홀은 그 소녀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마취를 해 주고 손가락을 분리해 각각 붕대로 감고 똑바로 편 후 부목을 대 주었다. 그러나 상처가 회복될 기미가 없자, 로제타 홀은 “피부 이식을 하기로 하고 환자의 팔에서 한 조각의 피부를 떼어 환자의 손가락에 이식했다. 다시 팔에서 피부를 떼려 하자 겁먹은 소녀는 거세게 거부 하였다. 그 순간 로제타 홀에게는 통역이 없었다. 자신의 의도를 알릴 방법이 없자, 로제타 홀은 자신의 팔에서 피부 세 쪽을 떼어 소녀의 손가락에 이식했다.

당시 자신의 피부까지 떼어 환자를 치료했던 로제타의 모습은 환자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 소문은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 갔고, 사람들은 로제타 홀을 칭찬하며 그녀의 사역을 신뢰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헌신적인 모습들이 문창모 박사 같은 이들에게 전해져 로제타 홀과 같은 사랑과 의술을 펼칠 병원을 감리교회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라 본다. 감리교회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의사들을 모아 병원을 만들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료 받으리라 확신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문창모 박사가 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인으로서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문창모 박사가 일했던 해주병원에서는 병원 사역을 전도의 기회로 사용했다.

다시 감리회보의 “감리교 병원을 세우렵니다” 라고 기고했던 문창모 박사의 글로 돌아가 보자. 그는 감리교회가 병원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성한 사람에게는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지만,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먹기가 쉬워 병원에서 전도하는 일은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오랜 피난생활로 약해지고 적군의 포탄에 상한 몸을 가진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만지며 치료해 줄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먹을 것 먹지 못하고 입을 것 입지 못하며 오랜 세월 기도하며 복음 전했던 사역자와 교인들을 치료할 병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어둠에서 헤매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쳐주고, 날로 날로 삐뚤어가는 우리 겨레의 마음을 바로 잡아 주려면, 그리고 제사장의 임무를 감당하려고 애쓰는 하나님의 종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참다운 봉사를 표방하는 좋은 병원이 필요하다 하였다.

문창모 박사는 이런 이유들을 설명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병원을 세울자 누구이냐? 내일 일은 내가 모르지만, 오늘 이 땅에 있어서는 우리 감리교회가 아니면 없을 줄 알고 병원을 세울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라고 호소했다.

그의 이런 간절한 호소와 노력의 결실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기독병원’은 인천시 율목리 237번지에서 1952년 5월 26일 다시 문을 열었다. 개원한 인천기독병원은 강석봉 박사(초대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한국 감리교회와 미국 감리교회의 전적인 도움과 후원이 있어 가능했다. 미국 교회는 필요할 때마다 의료기구와 선교비, 그리고 의료선교사를 파송해 가며 경인지역 최고의 병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천기독병원은 주변에 대학병원이 생기기 전까지 인천 최고의 병원으로 인천과 주변 지역 주민들이 사랑했던 병원이었다. 특별히 교회와 교인들이 많이 사랑한 병원이었다. 인천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유난히 감리교회가 많은 이유는 인천기독병원이 인천지역에 끼친 공로와 영향력 때문이었다. 

긴 글을 마치려한다. 1951년 11월 부산, 장로교 중앙교회를 빌려가며 병원을 세울 것을 합의한지 70년이 가까이 다가온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생각, 정치, 문화, 교회, 의료 환경까지 너무 많이 변했다. 이전과 다르게 좋은 의사와 약, 병원을 자유롭게 가면서, 사람들의 평균 수명과 기대 수명도 높아졌다. 우리병원에서도 해마다 많은 약을 준비해 동남아로 의료선교를 다녀올 정도로 우리의 삶은 이전과 다르게 풍요롭다.  

이 기고를 준비하며 문창모 박사의 글을 다시 읽는 동안, 문창모 박사의 마음과 생각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세상은 변하고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졌는데, 여전히 우리는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는 세속화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경제자유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힘을 잃고 있다. 게다가 세상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를 바라보며, 실망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또 차별금지법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를 막으려 한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에서도 복음 전하는 일이 어렵고, 공공장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해 보인다.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해 몰려오는 형국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늘 해왔던 선교 방법이 아닌 더 지혜로운 선교 방법을 감리교회가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감리교회 병원’을 세웠던 1951년 감리회 총회의 그모습을 우리가 다시 기대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일까? 유형기 감독님과 사회국 문창모 위원장은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 더 시급한 일이 많았던 전쟁 난민 시절에 병원이 먼저라고 뜻을 세웠다. 다시 문창모 박사의 마음과 뜻을 생각하며, 감리교회가 ‘의료선교사들이 한국 사람을 사랑한 마음과 사역을 기리는 병원’을 만드는 일에 뜻을 세우는 일은 어떨지, 인천기독병원 의료선교 100년을 바라보며 오늘의 감리교회와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감리교회가 세우고 운영햇던 해주 구세의원.
인천기독병원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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