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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와 삶홍성국 목사(평촌교회)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1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2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3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5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7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8 <마가복음 16:1-8>

두 개의 공동체 이야기 :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두 개의 공동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2제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12제자 공동체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12제자 공동체’가 십자가 사건 이후 한 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으나現存 그 누구도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현존 속의 부재不在’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치적 욕망 때문에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태동된 초대교회라는 교회공동체는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던 제자들과 120명의 성도가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안식 후 첫날, ‘주님의 날’에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주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힘쓰고, 필요에 따라 재산을 공유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모두가 헌신하였습니다. ‘12제자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 사이에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은 ‘부재속의 현존’現存을 경험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주님께서 몸으로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계시지 아니한 그분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무엇이 깨지고 흩어진 ‘12제자 공동체’를 다시 불러 모아 예루살렘 초대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태동시켰는가?” 성서는 그것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라고 증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생명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생명!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이 생명 안에 복음이 들어 있습니다. 깨지고 흩어진 12제자를 초대교회 공동체로 이어간 그 무엇은 ‘부활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활사건’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고 근거가 되었습니다.

부활절 이야기의 핵심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막16:6)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인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경험한 살아계신 주님을 그의 죽음 후에도 계속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지난 2000년 역사에 걸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행2:36) 로마의 정치권력과 유대교의 종교권력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인 권력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나 세상의 그 어느 무엇이 ‘큐리오스’主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이후에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이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메시지의 핵심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였습니다.

부활의 현재적 의미
1. 예수님의 삶과 정신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정신이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약자,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정부에 의해서는 ‘정치적인 반역자’로,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한 평생 동안 추구하셨던 삶과 정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 실존적 부활입니다.
날마다 자신이 죽고 주님으로 사는 것입니다.(갈2:20) 죽음과 부활은 서로 결합되어 변화된 자아로 가는 길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는 완전히 죽는 것이고, 부활은 죽은 것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주님 안에서 죽고, 주님 안에서 다시 사는 신비를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새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좌절이 사명으로 바뀌고, 방황이 확실한 목표로 바뀌었던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영원과 잇댄 삶을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건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9장(하늘에 가득한 영광의 하나님) 3절의 가사처럼, 영원과 잇댄 삶을 여기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3. 종말론적 부활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원한 부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12-22에서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부활이 있기에 ‘죽음 이후에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고전 15장이 고린도전서 전체의 근본주제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와 초대 그리스도교 케리그마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의 부활은 헬라철학이 말하는 영혼불멸설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입니다. 바르트는 부활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를 입을 때, 비육체적인 신령한 정신적 실체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몸을 ‘덧입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고후5:2) 그리스도교가 믿는 부활생명은 땅 위에서 몸 안에 살던 영혼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pneuma)이 직접 임재 함으로써 ‘영적인 몸’으로 질적 변화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는 ‘유한한 생명의 영화榮化’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몸’은 처음 아담이 창조 받았던 생기에 의해 만들어진 흙으로 된 몸이 아닙니다. 이것은 변화 받은 몸이고 새롭게 덧입은 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마지막으로 대망하는 종말적 영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도 모두 ‘은총의 선물’로 보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감사와 찬양의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적 생명을 감싸고 있는 두 괄호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두 괄호括弧이지만, 하나님은 그 괄호를 또 감싸고 있는 더 ‘근원적 괄호’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生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와 감사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귀중한 생을 알차게 영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기실현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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