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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let」 햄릿 거기 누구냐? ②송영범 목사(갈릴리교회)

고뇌하는 인간
그리스신화를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 세상으로 가져왔습니다. 문명의 선구자입니다. 이로 인해 제우스로부터 코카서스의 한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자신의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간은 하룻밤 사이 다시 회복되는 기능을 가진 기관입니다. 따라서 그가 받는 고통은 끝없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 의해 묶임에서 놓이게 되었습니다. 눈여겨 볼 점은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이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서 ‘간’이라는 시를 통해 프로메테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간’의 전문입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는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횃불을 훔쳐 인간 세상에 던져준 것과 독수리에 의해 간을 공격받는 모습을 통해 어둔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숙명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시며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진리는 다양한 뜻을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횃불을 끄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프로메테우스의 횃불과는 대조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의미입니다. 진정한 궐기가 이뤄지기 위해선 인간 손에 들린 횃불들은 수그러들어야하고, 그 위에 진정한 횃불만 타올라야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이처럼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지성인이었습니다. 결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던 실천가이기도 했습니다. 고통과 번뇌 속에 침잠하며, 그것을 천착하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인의 이런 모습이야말로 사회에 속히 귀속되고, 일치되려는 우리의 자아가 그의 시 앞에 묶일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주인공인 ‘나’가 추억으로 불려 일으켜질 과거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붉은색 가죽 표지가 씌워진 조그만 노트인 ‘호적부’를 들춰보는 것으로써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증명서가 있었는데 그 중에 주인공의 시선을 끄는 건 자기 부모의 혼인 증명서였습니다.

프랑스 라 오트 사부아 주 므제브 시청.
1944년 2월 24일, 17시 30분......
공식적으로 시청 청사에 기 자스파르 드 종그와
마리아 루이자 C가 출두하였음. 장래의 부부가 될 두 사람은 서로를 배우자로 선택할 것임을 차례로 선언하고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이들이 혼인에 의하여 결합되었음을 공포함.

소설은 모디아노 특유의 담담한 어조를 이어갑니다. 주인공은 현재의 빛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발견하려는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귀속되려는 대상은 수그러든 성냥개비의 불꽃처럼 기억 저편으로 절멸하여 들어간 과거의 먹먹한 몸짓이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저돌적인 전진은 아니었지만 기둥처럼 세워진 삶의 조각들 어딘가에 반짝이는 진실의 이면을 향한 새로운 전진이었습니다. 분명한 건 ‘미래 어딘가에 서성거릴 나’ 에서 ‘추억 속 나’를 향한 전향이야말로 새로운 횃불을 찾아가는 진지한 모험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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