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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한 영성학적 이해(2) 마음훈련의 영성적 의미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거하기 원하시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뜻에 더 많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마음이라는 공간에 욕심이라는 풍선을 부는 것과 같다. 그 풍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이 마음이라는 공간을 차지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작아진다. 만약에 욕심이나 근심의 풍선이 마음의 공간에서 95%를 차지하면 성령은 기껏해야 5%의 마음만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나 욕심과 근심으로 가득 차 질식할 정도로 좁아져 안타까워하며 긴 탄식을 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의 탄식을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의 마음이 욕심과 근심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기도를 해도 그것 이상을 기도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령께서 이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 가운데에서 탄식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지닌 우리가 언제나 먹어야 할 것과 입어야 할 것으로 대표되는 세상 근심에 둘러싸여 있음을 잘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이 말씀에서 “그의 나라”는 헬라어로 하나님의 다스림(the kingly reign)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배가 세상 근심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의 마음이 근심이나 욕심의 지배를 받으면 그 마음의 공간 안에서 성령이 지배하실 공간이 없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있으면 심리적으로 우리의 결핍이 문제가 되지 않기에 우리가 우리의 결핍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뜻만 추구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이 형성된다. 즉, 나의 결핍이 아닌 형제 자매의 결핍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노심초사하여 해결하는 것보다 더 풍요롭게 공급하신다는 의미다. 우리를 위해서도 하나님이 공급하시지만 우리가 이타적인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는 그 얼굴을 대면한다는 것이 아니다. 종말론적인 의미도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전제 조건이다. 청결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청결한 마음이란 무엇일까? 욕심 없는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것 또는 흔히 말하는 청정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성신학적 관점에서 청결한 마음이란 ‘한 가지만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무조건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되 한 가지만 열망하는 것이다. 그 한 가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다.

하나님은 나를 지배하기 원하신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가장 깊은 영성적 사유를 했던 히포의 감독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갈망 받기를 갈망 하신다.” 영혼이 한 가지만을 갈망하는 것이란, 바로 하나님의 임재만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로렌스 형제는 중세 시대에 평신도로서 그러한 삶의 길을 보여 준 인물이다. 로렌스 형제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중년이 지난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사가 아닌 수도사들을 위한 요리와 청소를 담당하였다. 그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그는 다시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일상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이 다르지 않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다른 것들을 요구하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주방에서도 나는 내가 복된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다.”

로렌스는 수도사가 아닌 평신도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이 가능하다. 다만 훈련하면 된다.

인간 존재의 중심이 되는 마음은 훈련하는 대로 된다. 영성훈련이란 그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며 그 훈련이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마음을 훈련하는 것을 다른 말로 마음의 닻을 내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도사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중 하나가 ‘anchorite’다. 일반적으로 공동체 수도원에서 수도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monk’라고 부르는 반면, ‘anchorite’는 홀로 수도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anchor’라는 말은 ‘닻’ 또는 ‘닻을 내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ite’가 결합되어 ‘닻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 것이다. 아무리 큰 배라도 닻을 내리지 않으면 흔들리고 심하면 표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닻을 내려 배를 고정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도 영혼의 안식을 위해,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위해서 마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려야 한다.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순절기를 보내고 부활절을 맞은 우리 존재의 중심인 마음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고요함과 거룩함을 경험해 보기를 갈망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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