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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웅의 시편 번역, 「성영역의」를 소개하며
‘히브리 시’가 동양적 사유 가득한 ‘거룩한 노래’로
송대선 목사(영파교회)
중국 기독교사의 역작인 오경웅吳經熊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풀어내고 해설한 「시편사색」이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영역의’를 번역하고 재해석한 송대선 목사와 출판사 꽃자리의 동의를 받고 시편사색에 실린 시편중 주요 내용 몇 편을 발췌해 지면을 통해 연재할 계획입니다. <편집자주> 

 

1946년 가을 중국 상해에서 「성영역의초고」(이후 역의라 한다)라는 책이 발간되어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紙價를 한껏 높였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2만 여부나 팔려 나갔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터였음에도 그렇게 많이 팔린 것은 누구도 상상하기 쉽잖은 일이었다. 게다가 「역의」는 구약 성경 시편의 사역私譯일 뿐이었음에도 일반 신문의 사회면에서 조차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책은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서 한동안 회자되었고 실제로 이 「역의」를 읽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꽤나 생겨났다. 이미 기독교가 중국에 전해진지 백 여 년이 되었고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음에도 이런 일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역의」가 정말 시詩였기 때문이고, 그 시를 읽는 중국인들에게 시적 감흥과 상상력을 넉넉히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 시적 감흥과 상상력을 통해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성경 시편은 우리말 성경과 비슷하게 운문보다는 산문에 가까웠다. 그러니 시편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 삶과 역사 속에 베푸신 은총을 영혼의 떨리는 고백과 찬양으로, 솟아나는 신앙적 상상력으로 전개시키기가 어려웠다. 시편詩篇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시詩는 아니었다.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해 사언, 오언, 칠언의 정형을 다듬으며 엄격한 율시를 지어 읊조리며 살아온 이들에게 산문 같은 시편은 사실 신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전에 선입견만으로도 조야했고 읽을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경웅과 시편 번역
이러한 「역의」를 번역한 이가 오경웅吳經熊(우징숑1899-1986) 선생인데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의 법 철학자이자 문인이다. 어려서 전통학문을 배우다가 곧 서양학문에 빠져들었는데 미국 감리교 선교회가 상해에 세운 동오법과학원을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 처음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점차 식어졌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국제법을 전공하였고 중국에 돌아와 상해의 조계지역을 관할하는 법원의 판사를 역임하여 솔로몬의 좌정이란 찬사도 받았다. 1934년 입법원에 들어가 중국의 헌법을 기초하기도 하였고 벗 임어당과 함께 천하天下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는 최고의 시기에 정신적 영적으로는 최악의 시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1937년 말 小花 데레사의 글을 읽고 회심을 경험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이후 평생 동안 매일 미사를 빠뜨리지 않으며 영성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새로운 신앙의 기쁨을 날마다 맛보는 가운데 오경웅의 즐거움은 히브리인들의 노래 시편을 중국식 운률에 맞추어 자신의 노래, 자신의 시로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편 두 편 번역한 것이 몇몇 사람들에게 나눠지고 결국에는 국민당의 장제스 주석에게도 전달되었다.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늘 ‘이렇게 아쉬운 번역으로도 하느님이 역사하시는데 만약 성경을 훌륭하게 번역한다면 얼마나 중국인들에게 큰 은혜와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셔서인가? 결국 두 사람은 국공 내전 중이던 1943년 충칭에서 만났고 장 주석 부부의 설득과 강력한 요청, 그리고 후원으로 시편번역을 시작하였다. 시편 150편이 6개월에 걸쳐 번역되었고 다시 일 년 반에 걸쳐 신약성서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장 주석은 교정을 자임하였다. 번역된 시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읽고 곰삭여 자신의 생각을 적어 돌려보냈는데 때로 그 교정은 방공호 속에서 이뤄지기도 하였다. 오경웅은 장 주석의 사유를 적절히 수용하였고 (그래서 지금도 대만에서는 이 「성영역의」와 「신약성경」을 장 총통 수정본手訂本이라 부르며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1946년 그 빛을 보게 되었다.

「성영역의」가 내는 맛
지면을 빌려 오경웅의 「역의」를 소개하고자 함은 그의 작업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노래인 히브리 시 150편이 동양적 사유로 가득한 거룩한 노래聖詠 150수首가 되었음을 일부만이라도 함께 맛보고자 함이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 눈여겨 볼 것 있다.

「역의」는 우선 시편으로 하여금 시가 되게 하였다. 당시唐詩의 운과 율에 젖어들고 시경詩經과 이소離騷가 입에 붙은 중국인들의 시가 되게 하고자 삼언, 사언, 오언, 칠언, 부賦 등의 시 형식을 빌렸다. 우리말 시가 3/4 혹은 7/5조로 읊을 때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처럼 이러한 형식 없이 시로 읊조려질 수는 없다. 더군다나 중국 시는 오언, 칠언으로 글자의 수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조의 높낮이까지 맞아야만 읊어지는지라 쉬운 작업이 아니다. 웬만한 능력으로는 그러한 번역이 시도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고典故의 인용이다. 시의 심상은 전고를 통해 풍성해지고 시적 상상력의 나래가 펼쳐진다.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에서 남산을 보며 국화를 캔다고 노래한 이후 동쪽 울타리와 국화는 선비의 삶과 정신을 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남포의 이별이 노래된 이후 버드나무 있는 포구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의 상징이 되어 남포라는 단어가 등장하자마자 안타까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난초의 향기는 사람이 없는 깊은 골짜기라 하여도 풍기지 않음이 없으니 난향이란 단어를 듣자 선비의 신독愼獨과 절개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읽는 이의 심상을 움직이고 그 심상 안에서 시인과 독자가 하나되는 전고의 인용은 시의 알짬이다. 그런데 오경웅은 시편을 번역하면서 시경과 서경, 주역, 논어와 맹자, 대학과 중용,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남화경과 사기 등의 역사서에서 셀 수 없이 전고를 끌어내었다.

아울러 이백과 두보, 굴원과 도연명, 소동파와 백거이, 왕유와 맹호연 등의 노래의 구절들을 인용하여서 그의 시편이 도무지 생경하지 않으며 도리어 수많은 심상들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본디 시라는 것이 개개 인간의 내밀한 의식의 밑바탕을 뒤흔들면서 동시에 인간 공동체의 공동정서를 분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다듬어지고 인용된 전고典故들이야 말로 지금 여기서 여전히 독자에게 생생하게 말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즉 이러한 전고와 토착적 해석으로 말미암아 시편이 깊은 묵상의 바탕이 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편을 소개하는 바람은 단순하다. 우선은 우리 삶에도 여전한 한자 문화적 사유를 신앙의 지평의 확장을 위한 선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다. 더욱 바라는 것은 이러한 글을 통해 언젠가 우리도 순우리말로 넉넉히 읊조릴 수 있는 시다운 시편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도 산문과 같아 입에 붙지 않고, 어디에서 선창하고 어디에서 후렴으로 호응해야하는지 알 수 없어 끙끙대는 이들에게 조용한 바람 하나 생겼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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