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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에 나타난 영성훈련(1) 무정념無情念의 가치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느낌들과 마음의 움직임들이 얼마나 복잡한지 차라리 내 머리카락을 세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 같다.” 이 말은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심오한 영적 사고를 한 영성가로 추앙받는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Confessions)에서 자신의 복잡한 내면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내면세계와 씨름하며 많은 기도자들은 오늘도 깊고 집중된 기도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통성기도나 방언기도가 아닌 침묵기도를 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복잡한 내면세계에 의해 방해 받는 것을 경험한다. 앞으로 몇 주간 동방정교회의 영적 고전인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마음의 고요 즉 무정념(헬라어로 아파떼이야)에 이르는 훈련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내면세계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하려는 노력은 이미 어거스틴 이전 시대부터 있어 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이집트 사막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였던 성 안토니이다. 안토니의 모범을 따라 동방정교회에서는 사막과 수도원에서 기도자가 내면세계의 다양한 생각들을 극복하고 정신을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기도 훈련을 해 왔다.

특별히 그리스의 성 아토스 산(Mt. Athos) 주변의 수도원에서 100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잡념을 극복하고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드리는 기도의 훈련을 해왔는데, 영성가들의 이 같은 영적 훈련의 경험을 책으로 편집하여 출간한 것이 「필로칼리아」(Philokalia)다. 이 필로칼리아는 적지 않은 분량(5권)에 대부분 성인으로 추대된 수도자들의 수도 경험을 통한 교훈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동방정교회 영성의 보고로 간주되어 왔다. 필로칼리아가 수도 생활을 하지 않는 개신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도 가치가 있는 것은 침묵기도를 하는 이들에게 무정념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로칼리아에서 제시하는 이 무정념에 이르는 세 가지의 주요 방법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죽음에 대한 명상, 둘째는 덕(virtues)의 실천, 셋째는 통회의 눈물을 통한 방법이다.

그럼, 먼저 무정념의 상태와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무정념의 상태란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을 극복하고 정신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기도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자는 물론 많은 현대인들은 마음의 고요(stillness of mind)를 경험하기 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잡념과 여러 가지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지곤 한다. 마음을 가라앉혀 집중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하기를 원하지만 끊임없는 생각의 활동들에 의해 마음은 자꾸만 흐트러진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너무나 쉽게 좌절된다.

외부로부터 마음에 자극을 받지 않기 위해 영성가들은 사람들을 떠나 광야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4세기 이집트 사막의 독거 수도자였던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수도자는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도 내면의 생각들에 의해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의 근원은 자기 사랑인데 이러한 자기 사랑으로부터 다양한 악한 생각들이 일어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생각의 활동에 의해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에바그리우스의 견해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너희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깨어 있는 시간 동안 생각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힘은 참으로 집요해서 심지어 잠자는 순간에도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꿈들을 숙고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잠재의식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생각의 활동들의 주된 요소들인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집중된 기도를 드리기가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를 “무정념이 된 상태에서 드리는 순수한 사고의 활동”으로 이해한다. 즉 에바그리우스에게 기도란 지성과 하나님과의 교제다. 다시 말해 생각의 활동들로부터 자유한 순수한 지성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것이 기도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자가 천사의 도움으로 완전한 무정념의 상태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한 4세기를 고려할 때 천사의 도움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성령의 도움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고요의 상태는 참된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관상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순수한 사고만 일어나는 상태에서 기도자는 성령의 지배 가운데 사고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이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타적인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에바그리우스는 “사랑은 무정념의 아들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무정념은 내면의 정적을 경험하기 원하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영적 훈련의 하나다.

그럼 이 무정념을 우리가 경험하는 통성기도와 어떻게 연관 지을 수 있을까? 필자는 우리가 성령의 임재 가운데 통성기도를 열심히 한 후에 느끼는 정신 상태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열심히 통성기도를 한 후 잠시 말하는 것을 멈추면 우리는 생각이 맑고 고요해 진 것을 느낀다. 그 상태에서 삶의 우선순위들이 정리되고 명료해 지는 것을 경험한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러한 상태를 “사색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그러한 상태가 가치 있는 순간이라고 확신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는 훈련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나날이 날씨가 더워지며 자칫 생각도 흐려지는 것 같다. 이번 한주 새벽기도에 전념해서 성령의 임재 가운데 통성기도를 드리고 그 후에 경험되는 무정념의 상태를 갈망해 보는 한 주가 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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