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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재판을 보면서1036호 사설

독일 법학자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법의 이념으로 정의, 법적 안정성, 합목적성을 제시했다. 정의 안에는 평등·공정 및 기본적 인권의 존중의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합목적성은 법이 존재하는 그 시대의 사회나 국가 이념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며 법적 안정성은 법이 안정적으로 기능하고 작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법의 내용이 명확하게 규정돼 있어야 하고 안정적 유지를 위해 자주 변경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이념들이 조화를 이루면 더할 나위 없는데, 종종 상호 모순처럼 충돌을 일으켜 문제가 되곤 한다. 자칫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법에 대한 분쟁과 불신이 생기게 된다.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악법惡法도 법’이라 하고 독배를 들었다는 일화는 법의 이념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이 발생할 경우 어느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는 결국 그 시대, 그 공동체의 몫이다.

최근 감리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재판이 주목을 받는다. 이성현·김재식 목사에 대한 총회 재판인데, 재판위는 심리를 끝내고 18일 최종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아직 판결이 나오지 않았으니 예단豫斷은 금물이지만 재판부가 상당한 고민에 빠져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재판은 총회 실행부위원회가 고소한 것으로 이성현·김재식 목사가 교리와장정이 정한 범과 중 ‘감독회장 선거와 관련해 교회재판을 받기 전 사회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범과인데, 문제는 이 범과를 적용할 경우 처벌이 오로지 ‘출교’뿐이라는 점이다(【1305】제5조 ⑤). 쉽게 말해서 법대로 하면 ‘유죄’가 맞고, 유죄를 선고하려면 이들을 ‘출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감리교회가 혼란스럽다보니 ‘출교’라는 조치가 너무 가볍게 생각되는 경향이 있지만 ‘출교’는 그리 쉽게 판단되고 처리되면 곤란하다. 

더욱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이 법이 지난번 입법의회에서 개정되면서 이른바 ‘악법’ 논란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주로 시비는 ‘교회재판을 받은 후 사회법정에 제소하여 패소하였을 경우 출교에 처한다’는 뒷부분에 집중되긴 했지만, 같은 항에 있는 ‘출교’의 처분도 과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악법 논란을 불러온 법이 미처 개정 논의를 하기 전에 적용되는 사례가 나오게 된 셈이다.   

물론 이번에 재판을 받는 이들을 악법에 의한 피해자라 단정하긴 쉽지 않다. 악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법이 나오게 된 당시 교단의 절박한 이유,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이번 재판의 대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소송의 남발로 교단이 혼란해 지는 것, 이 법이 막고자 했던 전형적인 사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악법 논란이 있다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법이고, 이번 입법의회에서 이 법을 개정한다는 내부적 합의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법의 합목적성과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법대로 판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교단 내부에 거세다.

총회 재판위가 재량권이란 이유로 엄연한 법 조항을 적용하지 않고 정치적 판단이나 인간적 고려를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시비와 갈등, 너도나도 교회법을 무시하고 교회 질서는 엉망이 되는 혼란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다.  

이런 교단내 정서와 악법 논란이 있는 법조항으로 성직자를 출교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 사이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가장 좋은 해법은 법적 판결 이전에 피고소인이 스스로 범과를 인정하고 잘못된 일을 원상으로 돌려놓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래야만 재판위의 부담도 덜고, 감리교회가 불필요한 상처를 입는 일도 더 이상 없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간의 사정을 고려볼 때, 피고소인들에게 그런 판단과 결단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간절함은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감독회장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지기 보다는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 답게 한 번 더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열어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공자孔子가 한 말 중에 ‘군자고궁君子固窮 소인궁사람의小人窮斯濫矣’라는 말이 있다. 소인은 자기가 궁하면 그릇된 일도 쉽게 범하지만, 군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곤궁하면서도 의연할 수 있는 것이 군자이며, 악惡을 선善으로 갚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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