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설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홍성국 목사(평촌교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43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4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45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사도행전 2:42-47> 
 

 

역사적 교회를 누가 태동시켰는가?

‘역사적 교회를 누가 태동시켰는가?’라는 논의는 오랜 세월 민감하고도 첨예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습니다. 이 물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교회의 권위 설정과 구조를 결정짓는 데에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태동되었는가?’라는 물음 앞에 크게 세 가지 부류의 해석이 등장했으며, 그것들은 각기 다른 교회론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교회의 태동을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설립 의도’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지상 사역 시작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설립하실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도는 ‘반석’(마16:18)이라고 표현한 베드로를 중심으로 구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으로 확대되었으며, 많은 경우 이 해석은 교회를 ‘제도적-교권적 교회’로 합리화하려는 교단들 속에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첫 번째 해석을 전면 거부하는 입장으로 적지 않은 신약성서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을 뿐 그 외에 그 어떤 종교적 제도나 심지어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자칫 ‘종파’(sect)나 ‘무교회주의’의 신학적 해석으로 나타날 가능성으로 남습니다.

세 번째 해석은 교회의 태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후속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해석은 ‘교권주의적 해석’으로 이를 ‘교회형’(church type)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해석은 ‘종파주의적 해석’으로 이를 ‘종파형’(sect type)이라고 호칭한다면(E.Throeltsch),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론적-종말론적-선교론적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로핑크, 몰트만, 맥브리엘 같은 신학자들이 속합니다.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역사 속에 도래 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사람들(제자들, 120명의 성도 그리고 그 외의 십자가로 인해 흩어졌던 수많은 사람들)을 성령께서 불러 모으신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부활 현현으로부터 나온 ‘후속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후속 공동체인 교회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약속 안에서만 교회의 생명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왜 열두 제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셨는가? 독일의 신학자였던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도래하는 그리고 장차 이룩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 거기에는 모든 민족들을, 의인과 죄인을, 부자와 가난한 자를 모두 불러 모으시는 우주적-종말론적 회집(eschatological gathering)을 미리 맛보고 또 이 땅에서 그 도래의 약속을 증거하는 ‘선교 공동체’로 부르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초대 교회에 대한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종말론적-선교론적 해석’은 ‘교회성장 신드롬’, ‘축복 만능 신앙’, ‘교회세습’ 같은 것들을 마치 교회의 본질인양 착각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비뚤어진 정체성 앞에 강력한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 교회도 아니고 교회의 본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론 이해는 교회는 목회자의 점유물도, 또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후속 공동체이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그 도래를 증언하는 하나님 백성 모두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네 가지 특징들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대교회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돌아가야 할 이상적인 교회의 모범이요 표준입니다.

(1) 초대교회는 배우는 교회였습니다.(42a절) 성령은 무엇보다도 ‘진리의 영’이므로 지성적인 행위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는 항상 힘써 배웁니다. 진리와 생명의 주님에 대해서 힘써 배웁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초대교인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웠습니다. 사도들은 오늘로 말하면 목회자들입니다.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이들로부터 말씀을 배웠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말씀을 배울 경우, 우리는 이단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권위를 갖춘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말씀공부와 체험은 함께 가야 하는데, 개인적인 체험이나 감정보다 말씀을 앞세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2) 초대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42b절) 여기서 ‘교제’라는 말은 헬라어로 ‘koinonia’라는 말인데 ‘공동’(common)을 뜻하는 ‘koinos’에서 왔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도들끼리 진정한 사랑과 사귐이 있는 공동체였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환경이나 성격, 취미 등등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을 경우 서로 상처를 주고 분쟁을 일으키기 쉬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초대교인들은 이런 문제들을 다 극복하고 서로를 세워주고 섬기는 아름다운 교제권交際圈을 형성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저들에게는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함께 나누는 것’(togetherness)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4-45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눈을 뜨게 됨으로써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3) 초대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였습니다.(42c절) 여기서 ‘떡을 뗀다’는 말은 성만찬을 의미하고, ‘기도’는 사적인 목적을 위한 개인기도라기보다는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실로 초대교회는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이상적인 교회였습니다. 먼저 성전에서 드리는 공식적인 예배와 집에서 드리는 비공식적인 예배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 다음에 초대교회는 또한 ‘두려움’(fear)과 ‘기쁨’(joy)이 조화를 이룬 교회였습니다.(43a절) 초대교회는 성도들 사이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항상 이와 같은 두려움만 있고 기쁨이 없으면 큰 문제입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b절) 초대교회에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고 성령이 늘 함께 계신다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4) 초대교회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학습과 교제와 예배가 초대교회의 내적인 모습이었다면 외적인 모습은 세상을 향하여 뻗어나가는 공동체였습니다.(outreach to the world)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성전이나 가정에서 모여서 말씀만 배우고, 교제만 하고, 기도만 했다면, 그것은 세상과 아무 상관도 없는 고립된 공동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이와 병행해서 날로 세상을 향해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결과 위로 늘 하나님을 찬미하여 영광과 존귀를 돌릴 뿐 아니라, 아래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때 날마다 구원받은 이들의 숫자가 더해졌습니다.(47절)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감리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