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회 감리회
"일본의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헐버트 선교사 70주기 추모식
생전 인터뷰에서 일본 평가 공개

“일본의 외교는 속임수가 전부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가 일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헐버트 박사 서거 70주기를 맞아 지난 9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100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추모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동진 회장은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헐버트 박사는 미국언론에 ‘한국의 소멸’이라는 글을 기고했다”며 내용을 밝혔다. 기고문에서 헐버트 박사는 “일본의 가면이 벗겨졌다. 일본 외교는 이중성이 전부다. 그들을 항상 처음에는 달콤한 말로 이웃나라를 돕는다고 하고 종국에는 그 나라를 갉아먹는다. 일본 외교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제 모든 나라는 일본의 사기 외교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일본의 이중성을 비난했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헐버트 선교사와 관련한 두 개의 신문기사가 공개됐다.

첫 번째 공개된 ‘스프링필드 유니언’ 1949년 7월 2일자에서 헐버트는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면서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 발명 △이순신의 거북선 △역사기록문화인 조선왕조실록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이민족 흡수문화’를 꼽았으며 마지막으로 삼일운동을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며 5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두 번째 신문기사는 헐버트 박사의 부인이 1910년 5월 8일 ‘뉴욕트리뷴’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을 비난한 내용으로, 기사는 헐버트 부인이 “한국상류층은 일본 상류층에게 굴욕을 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들에게 좌우로 두들려 맞으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김동진 회장은 “복잡한 한일관계 속에서 헐버트가 더욱 그리워지는 때”라면서 “헐버트 박사가 살아계신다면 대한민국 내부의 단결과, 통일을 통한 강력한 한반도를 주문하실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나아가자고 역설했다.

이날 추모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애국가와 헐버트 선교사의 고국인 미국국가 연주됐로 시작됐다. 신현주 서울연회 총무는 “진정한 애국자요 진정한 한국인이었던 헐버트 선교사를 본받아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사랑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용기있는 애국자가 되자”며 기도를 통해 헐버트의 신앙을 본받길 바랐다.

이어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주한 미대사관 미첼 모스 공보수석, 광복회 김원웅 회장이 추모사,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 노웅래 국회의원, 유동균 마포구청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이들은 헐버트 선교사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분 △한국에서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에 힘쓴 분이라고 평가하고 감사를 전했다.

특히 권재일 한글학회장은 “주시경 선생의 스승인 헐버트 박사는 한글학회의 창립정신을 내려주셨으며, 한글을 연구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백성들에게 전한 한글학자”라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편하고 쉽게 정확하고 품격 있게 쓰는 것은 헐버트 박사의 노력에 기인했다”고 평했다.

미첼 모스 공보수석은 “헐버트 박사는 미국에 한국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주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한미동맹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면서 한미파트너십의 진정한 영웅이라며 “헐버트가 수호하고자 했던 가치를 지켜나가고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중인 새터민 김다혜 씨는 헐버트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남북한 통합언어 연구를 진행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날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헐버트 연구에 공헌한 백영찬 장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호머 헐버트 선교사는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초청돼 1886년 조선 땅을 밟았으며,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1891년 12월 미국으로 귀환한 뒤 2년만에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책임자,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면서 YMCA 창립총회의장 등을 맡았다.

한글의 우수성을 안 뒤, 띄어쓰기 실시 아래아 없애기 등 한글발전과 배포에 앞장섰으며 독립신문 창간에 도움을 줬다. 아리랑에 담긴 서민의 애환을 풀이해 처음으로 서양곡조를 붙인 것도 헐버트였다.

헐버트 선교사는 고종으로부터 특사로 임명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으며, 헤이그특사 3인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해 특사들을 돕고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 3.1혁명 직후 미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 독립 호소문 제출 등 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일본에 의해 한국 땅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 40년 만에 국빈자격으로 1949년 7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온 헐버트 선교사는 일주일 만에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소천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5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태극장)과 2014년 10월 9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편 우리의 노래 ‘아리랑’에 서양식 곡조를 붙인 헐버트를 기념해 경북 문경시에는 ‘문경새재헌버트아리랑비’가 제막됐으며, 한글역사인물인 주시경과 헐버트 상징 조형물도 서울 종로구에서 만날 수 있다.

김혜은 기자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혜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