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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16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ㅇ)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9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20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21
 로마서 10장 16~21절

 

중앙연회 김종현 감독

로마서의 주제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입니다. 쉽게 풀어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 그리고 공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8~39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말씀하면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35절에서도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이나 위험이나 칼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구원의 반열에서 우리를 끌어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위하시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패란 있을 수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실패하였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이미 로마서 9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피로 인해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은 에서를 택하지 아니하고 야곱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저들이 버림받은 것은 스스로가 귀를 막았고, 스스로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저들의 마음이 강퍅함으로 하나님이 버리기 전에 저들 스스로 버린 바 되었다는 것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모든 구원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구원의 실패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함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며, 그 사실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이고 참된 믿음의 근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과 권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권능이 나타나기 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모든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덜 사랑했다든지, 하나님의 의지가 그를 구원함에 부족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불성설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로마서 10장 21절에서 사도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불효자입니다. 살아생전에 아버지의 재산에 분깃을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받은 재산으로 허랑방탕했을 뿐 아니라 다 낭비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입장에서 ‘어떻게 저런 놈이 내 아들인가?’ 화병에 걸려서 마음이 답답할 뿐 아니라 원수 같은 아들로 여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효한 자식을 뭘 그렇게 기다리겠습니까? 아버지는 분명, 이 자식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동구 밖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에서 거지 행색을 하고 오는 자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히 자기 자식임을 확인합니다. 그냥 맨발로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본문 21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종일토록 내 손을 벌렸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일토록’이라는 말은 원문상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이란 말로 목적격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매일 매일’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잠깐 기다리다가 포기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중단하지 않고 매일 매일,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홀렌 텐 헤메란’의 두 번째 의미는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한시도 기다리다가 그때를 놓칠까봐 혹시 이 아버지가 출타하여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무도 맞이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상할까봐 지속적으로 한 번도 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기다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21절에 ‘종일 손을 벌려 기다렸다’라는 말은 인내와 사랑의 양팔을 언제나 안으려는 자세, 너를 극진히 맞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미 내가 너를 용서하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하나님의 의지적인 표현이 오늘 21절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고, 우리 모두가 예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탕자의 소재를 가지고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바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 입니다. 이 그림은 높이가 2.62미터, 너비가 2.05m의 아주 큰 유화입니다. 탕자는 다 해진 신발, 왼쪽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는 아주 너덜거리는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거지꼴 행세를 하고 있고, 머리카락은 죄수와 같이 흐트러져서 가까이할 수 없는 아주 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안고 있는 왕 같아 보이는 아버지, 빛나는 황금 팔찌를 하고 채색옷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의 해석가는 ‘이 렘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은 제목이 잘못되었다. 탕자의 귀향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아버지가 안고 있는 거지행세를 한 불효자 아들, 냄새나는 아들, 다 떨어진 신발, 머리카락은 귀신 산발을 한 그 아들을 안고 있는데, 이 렘브란트는 어디에다가 중점을 두었냐 하면 아버지가 안고 있는 양팔에 두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 가해져 있는지, 얼마나 강한 모습으로 아들을 안고 있는지, 그냥 형식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형식적으로 너 왔구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끌어안고 그 강한 힘이 아버지의 양팔에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밉고 저주스럽다가 갑자기 아들을 보니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속에는 이 아버지는 천하의 불효자이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절반을 가지고 가서 다 탕진한 불효자이지만,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두었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용서해주리라! 내가 안아주리라!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성경 속에서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까? 아버지를 만나면 뭐라고 말할까? 수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 보았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으로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마치 대본을 외우듯, 아버지를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하리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연습하고, 또 연습하여,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말을 할 새 없이 아버지는 달려와서 입을 가슴으로 막고, 양팔로 끌어안아 이 아들을 용서하며 흐느껴 울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놓고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고, 인간에게 엄한 존재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에 방탕하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재능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네가 돌아오면 용서하리라’가 아니라 이미 용서해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다가 돌아오면 덥석 끌어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 모두가 느끼시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또한 ‘종일토록 손을 벌렸다’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 하나님의 인내가 숨겨져 있습니다. 자식을 양육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많이 배우고 경험이 많은 선생님과 양육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모자라고 무식하더라도 부모와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내의 차이’입니다. 제아무리 많이 배운 교사라 하더라도 제 자식이 아닌 이상 끝까지 인내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뉴스에서, 신문 기사에서 접하게 됩니다. 인내하지 못한 교사는 쉽게 야단을 칩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만 아이를 때리고, 비정상적으로 학대하고, 감정으로 화풀이를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 아주 많이 납니다. 마음도 답답합니다. 매번 밥을 먹다가 흘리고, 똥오줌을 아무 데나 싸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귀한 물건을 깨뜨립니다. 그럴 때마다 수없이 야단치고, 감정적으로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언젠가, 이 아이가 크면 철이 들겠지, 언젠가 그리하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려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고, 오늘 우리는 성장한 성숙한 인격자가 되었습니다. 부모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는 고아 신세가 되었을 것이고,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탕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부모님의 인내를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끝없는 사랑으로 기다려 주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인내하여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종일토록 손 벌려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탕자가 세상에 나아가서 탕진하고, 갖은 고통과 고난을 받은 것처럼 세상은 우리를 결코 행복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무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악한 마귀에게 유혹당하지 마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품 안에 안길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 품 안에서 참다운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들을 이미 용서해놓고 팔을 벌리시는 하나님, 종일토록 오늘도 내일도 쉬지 않고 기다리시는 그 하나님, 사랑과 인내와 용서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반복되는 죄 가운데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참다운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저 천국에 소망을 간직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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