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
정상과 비정상[특별기고] 김태원 목사(한빛교회)
   
▲ 김태원 목사

광화문에 있는 감리회 본부 빌딩은 내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오래전 신학교에 다닐 때 방학 때만 되면 교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후 감리회 목사가 되어 교육국에 몇 년간 근무하며 감리교의 교재들을 개발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때는 목회가 힘들 때 감리회 본부를 방문하면 마음이 참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감리회 본부를 방문하는 것이 조금은 꺼림직하고 부담스럽다. 가끔 본부를 방문하기 위해 광화문에 가면 우선 태극기 부대의 고함이 들린다. 어떤 사람은 확성기를 봉고차에 달고 차를 계속 반복해서 몰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한다. 한편에서는 70년대 복음 송을 크게 틀어놓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라며 복음 전도자가 외치고 있다. 맞은편에서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개혁을 외쳐대고 있다. 

어떤 때는 그 소음들이 나의 고막을 찢듯이 울려서 괴로울 때가 있다. 한국 사회가 참으로 혼란스럽다. 한국사회가 혼란스럽듯이 감리회도 혼란스럽다. 본부에 가면 늘 뒤숭숭하다. 계속해서 감리교회의 수장이 바뀌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감리교회가 이렇게 선장을 잃고 표류하는 것도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몸의 현상학을 주장했던 ‘메를르 퐁티’는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세계에서는 선과 악,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거시적 담론으로서의 지금의 한국사회를 보면 ‘메를르 퐁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주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극렬하게 데모하는 진보와 보수는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이것은 한국사회에 속해 있는 감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똑같은 사안을 가지고 교단 재판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을 보았다. 교단 내에서 재판하는 것도 똑같다. 도대체 어느 판결이 맞는 것일까? 지금 감리회는 아주 혼란 상태에 처해 있다.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서 ‘너 비정상이지’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 비정상이지’라는 소리를 들어온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역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너 비정상이지’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할 때도 있다. 

러시아의 소설가 뚜르게네프의 단편 중에 정신과 의사와 비정상적 정신병 환자를 다룬 소설이 있다. 어느 날 이 정신병 환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하려고 찾아왔다. 상담할 환자가 많아 너무나 바빴던 이 정신과 의사가 처음에는 이 정신병 환자에게 일주일에 30분이라는 시간을 할애했다. 그런데 첫 번째 상담을 하고 나서 이 의사는 그 상담 시간을 1시간으로 늘렸다. 그리고 두 번째 상담하고 나서는 또 두 시간으로 늘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 이 환자를 만날 때마다 상담 시간을 배로 늘려갔다. 급기야 일주일에 어느 한 날은 아예 환자를 받지 않고 이 의사는 그 환자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정신과 의사의 이 집착에 부담을 느낀 이 환자는 결국 더 이상 의사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만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이 환자에게 정신과 의사는 만나 달라고 애원하며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난 한순간도 살아 있을 수가 없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도대체 누가 환자고 누가 의사인가? 또한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

우리가 평상시에 쓰는 말 중에서 아무 의식 없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은 ‘저 사람 비정상적이다’라는 말이다.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이 거쳐 온 여러 시대에서 소위 ‘정상’이라는 기준을 임의로 설정해 놓고 거기 반하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비정상인으로 취급하여 감옥에 가두기도하고 정신병원에 격리해 왔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푸코에 의하면 이 세상에 순진한 지식은 없으며 지식과 권력이 은밀하게 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푸코는 이것을 뒤집어서 ‘힘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권력이 지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그 자체가 권력을 내포하며 어떤 권력도 지식과 진실의 정당화 없이는 행사될 수 없다. 

현실 내에서 정상인가 비정상인을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애써 규정한다면 정상은 진실을 추구하는 성향이고 비정상은 거짓을 추구하는 성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현실 생활 속에서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커뮤니케이션학자 ‘헥터 맥도날드’는 ‘만들어진 진실’이라는 책에서 ‘경합하는 진실’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은 보통 한 가지 이상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진실이 사건 규명을 위해 서로 경합을 한다. 그런데 이 경합하는 진실을 가지고 공동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겸손하고 긴장해야 한다. 맥도날드에 의하면 경합하는 진실을 가지고 공동체를 통합할 수 있는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자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가 믿고 있는 혹은 믿으려 하는 진실은 정말 진실인가?

둘째, 진실에 관해 내가 아는 내용을 상대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는 내가 이 진실을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할까?

셋째, 의도적으로 앞과 뒤를 생략하거나 단어나 문장을 뒤틀어서 진실을 오도하지 않는가?

넷째, 어느 한 편의 진실은 과연 반목하는 상대편의 진실이 될 수 있는가?

다섯째,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형태의 현실 인식을 똑같은 진리로서 전할 수도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경합적 진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맥도날드는 진실을 발언하는 유형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옹호자(Advocate)형인데 옹호자는 건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합하는 진실 중에서 어는 정도 정확한 현실 인식을 만들어내는 진실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둘째, 오보자(Misinformer)로서 악의는 업지만 경합하는 진실 중에서 의도치 않게 현실을 왜곡하는 진실을 퍼뜨리는 사람이다. 

셋째, 오도자(Misleader)로서 잘못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낼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내용의 경합하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 세 유형 중에서 제일 좋지 않은 유형은 오도자이다. 오도자는 허위 사실을 만들어내어 퍼뜨리는 사람이다. 오보자는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오도자는 용서될 수 없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학자 ‘한스 로슬링’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할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본능적 오류를 그의 책 ‘팩트풀니스’에서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다. 데이터는 분석하고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이다. 해석되지 않은 데이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는 자기 책에서 인간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할 때 오류를 범하는 본능적 실수를 여러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간극 본능, 부정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단일관점 본능, 다급함 본능 등이다.

인간은 데이터를 보면서 세상을 둘로 나누려는 간극 본능을 갖고 있다. 또한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부정 본능도 있다. 간극 본능은 당파성을 지니고 있고 부정 본능은 현 상태 유지(status quo)를 거부한다. 도덕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정부 여당은 간극 본능에 빠져 있고 정권 재창출을 원하는 야당은 부정 본능에 휩싸여 있다. 교단 정치를 심하게 하는 목사는 당파성이 강한 간극 본능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교단 개혁을 원하는 젊은 목사들은 부정 본능을 갖고 있다. 간극 본능이든, 부정 본능이든 이것이 너무 과하면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또한 공포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공포 본능은 세계를 공포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2차 대전 말기에 일본은 패망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일본인의 눈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흰 머리띠를 두르며 ‘정신일도하사불성’을 크게 외쳐댄다. 공포 본능은 실제로 적이 존재하지 않는데 허공에다 대고 칼을 마구 휘둘러댄다. 6·25를 경험한 태극기 부대는 대한민국이 완전히 좌경화될까봐 공포 본능을 갖고 있다. 공포 본능에 버금가는 다급함 본능이 있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매우 다급하게 데이터를 분석한다. 그래서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내년도 국회의원 총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정부 여당은 다급함 본능을 갖고 있다. 요즘 TV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초조한 모습이 느껴진다. 정확히 1년 후면 교단의 감독회장을 뽑게 된다. 여기저기 초조해하는 다급한 얼굴들을 보게 된다. 

크기 본능은 데이터의 크기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덜 중요하게 여기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해석한다. 일반화 본능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특정적인 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단일관점 본능은 오직 한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편견을 많이 갖게 된다. 

어떤 중년 부인이 조선시대 왕 중에 정치를 제일 잘한 분이 현종이라고 주장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현종만이 오직 부인이 한 명뿐이기 때문에 성군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단일관점 본능이다. 사물들은 데이터로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는지 ‘한스 로슬링’은 우리에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체주의 철학자인 ‘쟈크 데리다’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사물과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은 반드시 해야 할 필요한 작업이다. 필요함과 불가능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반드시 해야 하지만 완전한 진실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각도로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인간일 것이다. 

철학자 ‘리처드 버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은 수만 조각으로 깨진 거울인데 사람들은 내 작은 조각만이 전체인 줄 아네”라고 말한다.

감리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단편적 진실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감리교회라는 거대 담론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감리교 지도자 자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겸손함과 진실의 다양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열정이 필요하다. 지도자는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담론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감리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는 다양한 진실 속에서 감리교회를 존 웨슬리가 전한 복음으로 통합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타임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Back to Top